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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화가 오면 어떻게 해요?"
배우 이나영이 물었다. 보통 여러 매체가 한 번에 임하는 '라운드 인터뷰'에서는 빠트리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어 녹음하기 위해 배우 앞에 녹음 기능을 켠 핸드폰을 둔다. 이나영의 앞에도 여러 대의 핸드폰이 놓였다. 그 핸드폰을 보며 이나영은 물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박하경 같았고, 또 이나영 같았다.
"제가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그냥 하는 걸 좋아해요. 그런 걸 이종필 감독님께서 열어주셨어요. 저에겐 그냥 날 것이었어요. 짜여있지 않게 현장에 많이 내던진 것 같아요." -
웨이브 시리즈 '박하경 여행기'는 제목 그대로 박하경(이나영)이 여행하는 이야기를 담은 시리즈다. 8편으로 구성된 시리즈에는 그 흔한 악역도 없다. 일상의 어떤 순간에서 빠져나온 박하경이 즐기는 딱 하루의 여행이 시리즈 속에 담겨있다. 콘티도 없이 촬영된 작품에서 이나영은 매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배우들과 새로운 장소에서 호흡을 맞췄다. 날 것 그대로의 이나영이 '박하경 여행기'에 담긴 이유다.
이나영이 '박하경 여행기' 출연을 결정한 것에는 대단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 앞에는 '3년 만에 복귀작'이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사실 이나영에게 그 3년은 '하고 싶은 작품의 시나리오를 찾던' 시간에 불과했다.
"대단한 결심은 없어요. 저는 계속 시나리오를 접하고 있어요. '박하경 여행기'를 볼 때 너무 좋았어요. 정말 모든 게 완벽했어요. 일단 구성 자체가 엄청 독특하잖아요. 그리고 지금 시대랑 잘 맞는다고 생각되는 미드폼(약 2~30분 분량의 짧은 시간) 형식의 콘텐츠였고요. 보자마자 하고 싶었고, 이종필 감독님을 뵙고 진짜 고민 없이 했던 것 같아요. 솔직히 멍때리기를 잘하면 되겠다고 쉽게 생각을 한 것도 같아요." -
출연을 결정하고 쉽게 생각한 것이 어렵게 다가왔다. 배우 구교환, 길혜연, 박세완, 박인환, 서현우, 선우정아, 신현지, 심은경, 조현철, 한예리의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때, 막막해졌다.
"이분들이 나오시는데, 내가 어떻게 채워가지? 전체적인 흐름이 있나? 처음에 생각하지 못한 것들에 걱정이 앞섰어요. 박하경이라는 캐릭터에서 정해진 건 '국어 선생님'이라는 것밖에 없었어요. 고민이 한 바탕 지나가고 정해진 게 하나도 없으니, 현장에서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느낌으로 해야겠다고 생각되더라고요. 처음에는 쉽게 생각한 것들이 어렵게 다가온 거죠. 준비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거잖아요."
"할 때는 몰랐지만, 덕분에 희한한 경험을 많이 했어요. 정해진 캐릭터가 없어서 나올 수 있었던 무방비한 자유로움이었죠. 예를 들면, NG가 나거나 어색할수록 더 재미있어진다는 것? 제가 어떤 배우랑 이야기하다가 중간에 모기를 잡았대요. 잡고, 휴지에 쓱 닦으며 대화를 이어 나간 거예요. 또, 새벽 첫 기차로 촬영하러 가는 길에 진짜 잠들었어요. 스태프들이 걱정해 주더라고요. 이게 나와도 되는 거냐고요. 그게 사실 일상이잖아요. 현장의 열려있는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어 준 것 같아요. 그 편안함을 시청자들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배우들과의 호흡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가장 처음 촬영했던 에피소드는 배우 구교환과 함께한 부산에서 에피소드였다. 영화제 기간 때문에 촬영 일정이 가장 앞으로 왔다. 이나영은 구교환에 대해 "기다려 왔던 호흡"이라고 밝혔다.
"'박하경 여행기'에 있는 유일한 멜로 잖아요. 메타 멜로이긴 하지만. 그리고 약간 긴 호흡도 있어요. 그때 이상한 엇박자와 이상한 시너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다시 봤어요. 대사를 외우는 것부터 긴장했어요. 나중에 스태프들이 회식할 때, 하경이의 러브 라인이 미술 선생님(조현철)인지 창진(구교환)인지를 두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스태프까지 토론하는 게 고맙기도 하고, 저런 시선으로 볼 수 있구나 싶기도 하고요." (웃음)
1화에서는 가수 선우정아와 호흡을 맞췄다. 연기가 본업이 아닌, 어찌 보면 비 전문 배우다. 모델 신현지 역시 2화 속에서 배우로 등장한다. 이나영은 오히려 "그런 신선한 캐스팅이 매력 같아요"라고 답변을 시작했다. -
- ▲ 영상 : 허준영 영상기자,popkorns@chosun.com
"오히려 연기를 안 해보신 분들이 나오는 장면이 너무 좋았거든요. 그 콘트라베이스를 너무 좋아해요. 약간 어색하지만, 딱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요. 바위에서 둘이 멜로 아닌 멜로를 촬영했는데요. 이종필 감독님은 모든 것에 '멜로'를 넣으시거든요. 경주에서 버스정류장에 할머니랑 둘이 앉아있는데도 멜로라고 하고요. 사람으로 사랑을 바라보신 거죠. 선우정아 님이 저를 바라보고, 제가 그 분을 바라보는데, 그때도 이상한 울컥거림이 있었어요."
꿈에 관해 이야기하던 2화에서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한예리를 바라보기만 해도 눈물이 났다. 박하경은 예술가로 한 발씩 내딛어가는 옛 제자 연주(한예리)의 전시회를 보러 간 군산에서 과거 그의 꿈을 응원했던 자신까지 마주하게 된다.
"장소마다 만나는 인물이 다르잖아요. 그래서 비우고, 현장에서의 호흡을 잘 맞춰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진짜 이상하게 그 현장에서 계속 눈물이 나는 거예요.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었어요. '으랏차 라구라구' 외치는 풀샷을 찍는데, 제가 너무 많이 울었어요. '이건 못 쓰겠다' 싶었어요. 그 뒤로도 한예리 님 얼굴만 봐도 너무 눈물이 났어요. 뭔지 모르겠지만, 하경의 복합적인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랄까요. 그 마음을 많이 누르면서 촬영했어요." -
이나영은 시나리오에 없었던 춤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시나리오에 있었던 춤도 연습 없이 선보였다. "원래 춤을 잘 추는 친구가 아니다 보니"라며 "테이크가 몇 번 가니, 익숙해져서 잘 춰지더라고요"라고 웃음 짓는 그다.
날 것을 연기한 만큼 이나영이 담겼다. 이나영은 "운동 선생님께서는 평상시 제 모습을 아시잖아요. 보시고 '진짜 이나영과 이야기하는 것 같던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냥 리액션부터해서 진짜 저랑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요"라고 말했다. 실제 이나영은 박하경과 달리 좀 더 계획적인 편이고, 당일치기보다는 최소 3박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박하경처럼 여행지에서 모르는 사람과도 밥 한 끼 함께 먹을 수 있고,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다.
"가끔 뭔가에 지치거나 스트레스받을 때, 저는 일단 동네 친구 붙잡고 수다를 떠는 편이에요. 이야기하면서 떨쳐내는 편이거든요. 여행을 좋아하는 편인데, 딱히 취미라고 할 게 없어서 영화를 보면서 치유를 받는 것 같아요. 영화를 보면서 연기도 많이 배우거든요." -
이나영은 '박하경 여행기'를 공개하며 오랜만에 예능을 통해 대중과 만났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선 것은 과거 '무한도전' 출연 이후 처음. 이나영은 지난달 22일 유튜브채널 'BANGTANTV'를 통해 공개된 '슈취타 EP.11 SUGA with 이나영'에 출연해 슈가와의 대화를 나눴다.
"슈가 씨가 싱글앨범을 앞두고 다큐멘터리를 찍었는데, 여행 컨셉으로 했대요. 그리고 '슈취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제가 가사를 잘 못 듣는 편인데, '사람'이라는 곡이 빠르게 진행되는데도 단어들이 들어오더라고요. 저는 제가 재미없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또 어디에서 말을 많이 하고 집에 오면 후회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사람'이라는 키워드와 '여행'이라는 키워드가 '슈취타'랑 딱 맞더라고요. 그래서 도전했고, 제가 긴장할까 봐 배려해 주신 것 같은데요. 슈가 씨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며 공감대도 많고, 비슷한 점도 많았고요. 슈가 씨가 아닌 사람 민윤기 씨를 만나고 온 느낌이었어요. 또, 박하경이 슈취타로 여행을 가서 슈가 씨를 만나고 온 느낌이기도 했고요." (웃음)
'박하경 여행기'를 통해 작품 안에서, 밖에서 이나영을 꺼냈다. '신비주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그가 문을 열고 나온 느낌이다. 이나영은 "멍때리고 보면 좋겠어요. 요즘 시대가 너무 빨라서 놀라곤 하거든요"라고 '박하경 여행기'를 추천하고 싶다는 이나영을 언제, 어떤 작품으로 만날 수 있을까.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요. 시나리오가 아직 안 나왔어요. 나와봐야 해요. 언제라고 말씀은 정확히 말씀은 못 드리지만, 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