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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전도연 선배님께서 주연이 아닐 때부터 팬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엄청난 대배우가 되셨고, 지금은 팬이라기보다 '우상'이죠. 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용이나 해태'같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볼 수 없는 느낌의 그런 사람이었어요. 어떤 외국 배우보다 더요."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변성현 감독이 배우 전도연에 대해 말했다. 전도연과 처음 만난 술자리에서 술잔을 덜덜 떨었다고 밝힌 그는 앞선 여러 자리에서 '전도연을 두고 '길복순'을 썼다'라고 했다. 그리고 전도연이 다양한 장르에서 '레전드'로 남는 연기를 선보인 만큼, 측면돌파 하기 위해 '액션'이라는 장르를 택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관객들은 전도연 주연의 뜨거운 액션 영화를 만날 수 있게 됐다.
'길복순'은 킬러이자 엄마인 길복순(전도연)의 이야기를 담았다. 길복순은 글로벌 킬러 회사 MK 소속 A급 킬러다. 맡은 일은 반드시 해치운다. 딸 재영(김시아)에게 킬러임을 숨기고 엄마로 살아가던 길복순은 회사와 재계약을 앞둔 시점에서 고민한다. 그사이 늘 A급 킬러로 살아온 그를 견제하는 사람에 의해 한 사건에 휘말린다. 변성현 감독은 '길복순'의 이야기를 배우이자 엄마로 살아가는 전도연과 그의 딸을 지켜보며 시나리오를 썼다. -
Q. '길복순'이 공개 이후 3일 만에 넷플릭스 영화 월드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 이후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입증인데, 실감하나.
"사실 저는 집에 있어서 실감이 잘 안난다. 그런데 얼마 전, 미국에서 제안이 왔다. 그걸 보면서 '잘 되고 있나보다'라고 기쁨이 아닌 안도가 느껴졌다. '미국 진출의 기회'라고 생각하기보다 '진짜 관심 있게 잘 봐주고 계신가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Q. 처음 작품을 함께하자고 제안한 것은 전도연이었다고 들었다. 그 이후 어떻게 함께 작품을 하게 되었나.
"선배님께서 시나리오를 주셨는데 제가 거절했다. 제가 쓴 작품으로 연출을 하고 싶었다. 연출은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나리오는 어느 순간 쓰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전도연을 주연으로 한 영화를 찍으면 '너무 잘 찍어야 할 것 같다'라는 부담감이 있었다. 반면, '내가 왜 이 기회를 놓치지. 배우라면 가장 좋은 배우랑 일하고 싶은 마음이 당연한 건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선배님을 두고 시나리오를 쓰면 함께 하실 생각이 있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해보자'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뭘 할까'고민하다가, 가장 전도연이 안 할 것 같은 장르를 떠올렸다. 그게 액션이었다." -
Q. 전도연의 어떤 면을 보고 킬러를 떠올렸나.
"체구가 작으셔서, 리얼 액션으로 하면 너무 '가짜'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현실에서 좀 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실과 좀 괴리감이 있는. 하지만, 그 이야기는 배우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오고 싶었다. 영화적인 이야기도 전도연에게 나왔다. 톱스타로 살아가는 전도연이 딸 앞에서 엄마로 고민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우리나라 최고의 연기파 배우가 액션이라는 장르를 소화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리고 이와 똑같이 뻔뻔하게 현실에 없을 것 같은 공간에서 하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Q. 길복순은 전도연과 많은 대화를 하며 만든 캐릭터라고 했다. 그런데 딸 재영이는 어떻게 구상했나. 실제 전도연의 딸과 이름도 같다.
"실제 전도연의 딸을 재영 캐릭터에 투영하지는 않았다. 재영이는 좀 시크한 편인데, 전도연은 딸과 친구처럼 잘 지내는 타입이다. 사실 길복순과 딸의 대화를 시나리오로 쓰다가 막혔다. 제가 결혼도 안 했고, 아들이면 어떻게든 만들어 보겠는데, 딸은 엄마랑 어떻게 대화하는지 모르겠더라. 전도연에게 SOS를 요청했더니, 집에 초대해 주셨다. 밥 먹고 딸과 지내는 전도연을 계속 지켜봤다. 카드 게임도 하고, 보드 게임도 하고,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며 '엄마와 딸은 이렇게 대화하는구나'라고 알게됐다. 그 이후로도 가서 그런 걸 지켜보는 시간을 가졌다. 많은 도움이 됐다." -
Q. 전도연과는 첫 작업이지만, 설경구와는 세 번째 작업이다. 관객들에게 '설경구를 세상에서 가장 섹시하게 찍는 남자'라는 평도 있다.
"설경구의 이미지는 사실 한국의 보편적인 아저씨와 닮아있다. 그래서 멋있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쓴다. 사실 전도연은 더 욕심을 낼 뿐, 막 찍어도 어느 각도에서도 너무 좋다. 그런데 설경구는 절대 막 찍으면 안 된다. (웃음) 설경구의 최고의 매력은 그분의 연기다. 연기하는 설경구의 모습을 담고 있으면 이 부분을 관객이 섹시하다고 생각한다고 느껴진다. 이제 설경구와 인간적인 모습을 담은 작품도 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박하사탕'을 이야기하는데, 그때는 충격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오아시스'가 더 놀라웠다. 제가 '오아시스' 같은 시나리오를 쓸 자신은 없지만, 능력이 되면 그런 캐릭터를 한 번 같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Q. '길복순'에서 논란이 된 장면도 있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때 감독님의 SNS 글이 논란이 된 후, 계속 이어지는 정치적 성향에 관련된 내용이다. 사실 SNS를 통해 오랜시간 위안부 문제 등에 관심을 표현하기도 했고, 전작도 '킹메이커'였다. 논란과 관련 억울한 지점도 있을 것 같다.
"'불한당' 때는 분명히 제가 말실수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락받고 너무 당황했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 전도연이 어마어마한 도전을 한 작품인데, 그 도전을 물거품으로 만들까 봐 죄송하다고 연락드렸다. 논란이 되는 정치 성향과 거의 정반대 편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자꾸 얽히게 된다. 제 전작 '킹메이커'가 지역감정에 대한 비판적인 제 시선을 담은 작품인데, '길복순'에서 다시 이런 논란이 불거지니, 모순을 담은 작품에 제 상황도 따라가나 싶었다."
Q. 논란이 된 대표적 장면이 MK에서 소속 킬러에게 작업을 전달하는 봉투에 써진 지명이었다. '서울-코리아'라는 식으로 도시와 나라가 매칭이 되어있는데 '순천-전라'라고 써진 봉투가 등장했다.
"MK에서 킬러들의 등급을 A, B, C 등으로 나눈다. A급 킬러는 큰 예산으로 글로벌하게 활동하고, C나 D등급의 킬러는 우리나라 지방 소도시의 예산이 적은 일을 맡는다는 설정이었다. 지역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제가 컨펌을 하지 않은 부분이라, 논란이 불거졌을 때 미술감독님께서 너무 미안해했다. 미술감독님 고향이 '예산-충청'인데 그렇게 하시지 싶었다. 경황이 없어서 전화도 못 받았다. 생각해 보면, 제가 아니었으면 아무 논란 없이 지나갈 장면이었는데, 저로 인해 불거진 논란 같았다. 스태프들에게 오히려 제가 더 미안하다." -
Q. 앞서 "현실에 없을 것 같은 공간에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고 생각했다"라고 이야기했다. '길복순'은 실제로 붉은색, 녹색 등 강렬한 색감의 대비와 빠르고 멈춤의 속도 대비 등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스타일리시한 화면이 '변성현 감독'의 시그니처가 되기도 했는데, 얼마나 고민하고 만들어진 장면인가.
"콘티 작업은 한 5개월 정도 소요됐다. 원래 모든 작품마다, 콘티 작업을 길게 하는 편이다. 보통 색감 등은 촬영감독, 콘티 작가님과 회의를 많이 거치는데, 이번에는 프로덕션 디자이너 시스템으로 해서 한아름 미술감독님과 색과 톤 등 컨셉을 정했다. 미술감독님의 아이디어가 많다. 레드와 그린의 대비는 길복순과 딸의 대비를 생각하며 협업한 결과물이다."
Q. 앞서 90년대 영화를 사랑한다고 하며 '이명세 감독'을 언급하기도 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의 작품을 연출한 감독에게 어떤 부분을 영감으로 받게 됐나.
"이명세 감독님의 작품은 액션뿐만 아니라 비주얼적인 부분에서 영감을 받았다. 액션에서는 타이트하게 찍어서 끊어서 편집하는 방식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액션에서는 '쿵푸허슬'의 식칼 등 주성치 영화를 오마주한 장면도 있었다. 어느 공간에서 어떤 동작으로 싸우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싶어서, 풀샷보다 넓게 보이는 앵글을 잡기도 했다. 이명세 감독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은 없는데 어느 날 문자를 받았다. '영화감독이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에 영화감독으로 남아줘서 고맙다'라는 말씀이셨다. 제가 받은 어떤 리뷰보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초청 발표 났을 때보다 더 영광스러웠다." -
Q. '길복순'의 엔딩 때문에 스핀오프에 대한 언급도 이어지고 있다. 재영이 아빠를 기대해 봐도 될까.
"사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세계관은 생각했다. 이런 작품을 쓰면서 말이 되게 하려면, 세계관을 만들어 놓고 써야 한다. 그래서 제가 쓸 생각은 있는데, 연출은 안할 거다. 현장에서 배우를 괴롭히는, 괴로운 걸 보고 있는 건 안 하고 싶다. 재영이 아빠 역시 제 머릿속에 있는 것들이다. 만약 스핀오프 작품을 쓴다면, 쿠키영상 속 재영과 이어지지는 않을 거다.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Q. '변성현 감독'이라는 글자가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관객에게 기대감을 심어주는 이름이기도 하다. 작품을 연출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뭘까.
"예전에는 동의를 안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배우'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스타일리시하다는 이야기는 이명세 감독님 같은 분이 들어야 하는 것 같다. 저는 예쁘게 찍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고, 배우의 감정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가면 갈수록 진해지는 생각이다. 저는 디렉팅하는 사람이고, 결국 해내는 것은 배우다. 저를 비롯한 스태프들이 하는 빛과 앵글 등은 모두 배우를 향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스태프들과도 많이 한다."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