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 한 해에도 방송 콘텐츠 시장은 꾸준히 몸집을 키웠다. 지난 7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콘텐츠산업 2022년 결산 및 2023년 전망'에 따르면, 올 한 해에만 콘텐츠 매출액이 약 147조 원, 그중 방송 콘텐츠가 24조 6천억 원으로 가장 높은 부분을 차지했다.
시장 규모가 커진 만큼 방송계는 더 치열해졌다. 한때 '드라마 왕국', '예능 왕국'을 호령하던 방송사들은 자회사를 통해 콘텐츠 경쟁에 뛰어들었다. 채널을 막론하고, 흥행을 좇느라 우후죽순 유사한 포맷이 양산됐고 그 안에서 제대로 된 공감을 끌어낸 콘텐츠만이 흥했다. 신생 채널에서 대박을 터트린 '우영우', 양지로 올라온 BL 콘텐츠처럼 마이너라 여겨졌던 이들의 도전도 있었다. 2022년 방송가를 설명할 수 있는 몇 가지 키워드를 꼽았다.
◆ 드라마·예능도 탈방송국…스튜디오화 가속 -
뉴미디어와 OTT 생태계가 확장되면서, 방송 콘텐츠는 방송사의 전유물이 아니게 됐다. 이에 방송사는 돌파구로 자회사를 택했다. 프로그램 제작을 담당하는 자회사를 설립해 방송사 규제에서 벗어나 플랫폼을 넘나들 창구를 마련한 것. 대부분 자회사 제작 프로그램이 지주사인 채널로 송출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엔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와의 협업으로 글로벌 시장에 K콘텐츠를 선보이며 수익성을 높이고 있다.
SBS 지분이 98%에 가까운 드라마 제작사 스튜디오S는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과 '천원짜리 변호사' 제작, '사내맞선'을 기획했다. 세 작품 모두 TV 방영과 함께 OTT에 동시 공개됐다. '사내맞선'은 2022년 넷플릭스 상위 100개작(플릭스 패트롤 기준) 중 14위에 오르며 호평을 이끌었고, '천원짜리 변호사'는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 지역에서 방영 기간 동안 디즈니+ 톱10 자리를 지키는 등 성과를 거뒀다.
중앙그룹 계열사 제이콘텐트리의 자회사 JTBC스튜디오는 지난 4월 사명을 'SLL'로 바꾸고 글로벌 제작사 도약을 자신했다. SLL은 넷플릭스에서 신기록을 세운 '지금 우리 학교는'을 비롯해 2022년 시청률 1위 미니시리즈 '재벌집 막내아들'을 제작, 장르와 플랫폼을 넘나들며 대표작을 새로 쓰고 있다. -
드라마계만 제작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방송사가 제작하던 예능도 이젠 스튜디오로 옮겨가고 있다. 방송사를 대표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PD들이 예능 제작사를 설립하거나 이적하면서, 원천 IP를 무기로 삼은 예능 스튜디오판이 커지고 있다.
'무한도전'을 이끈 MBC 간판 예능PD 김태호는 제작사 테오를 설립한 후 예능 '먹보와 털보', '서울 체크인', '캐나다 체크인' 등을 선보였다. 특히 올해엔 '대탈출', '여고추리반'을 만든 정종연 PD, '놀라운 토요일'을 연출한 이태경 PD가 테오에 합류했다. '런닝맨', '패밀리가 떴다' 등 SBS 대표 예능을 연출한 조효진 PD는 일찌감치 방송사를 떠나 제작사로 향했다. 컴퍼니상상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뽕숭아학당', '범인은 바로 너!' 시리즈, '신세계로부터', '더 존: 버터야 산다'를 선보였다. 이외에도 '날아라 슛돌이', '천하무적 야구단'을 기획한 최재형 PD는 올초 KBS를 퇴사하고 스튜디오 수파두파를 설립, TV조선의 서혜진 PD 역시 스튜디오 크레아를 세우고 독립했다.
특히, SBS는 국내 방송사 중 최초로 '예능본부 분사'라는 도전에 나선다. 예능 스튜디오를 설립해 SBS와 스튜디오의 동반성장을 노린다는 것. 내년 상반기 분사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 많아도 너무 많은 연애 리얼리티, 소재 다양화ing -
올 한 해 예능은 연애 리얼리티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플랫폼을 통틀어 올해 방영된 연애 예능만 스무 개가 넘는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만큼, 각각의 차별 포인트를 내세우기도 했다.
티빙 '환승연애2'와 MBN·ENA '돌싱글즈3'는 기존 시청층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화제성을 몰았다. 출연자들의 감정 변화와 공감을 유발하는 서사로 '극사실주의 연애 예능'이라는 평을 얻었다.
연애 리얼리티에 시청자의 다양한 관심사를 넣기도 했다. 골프를 함께하며 펼치는 웨이브 심리 연애 버라이어티 '홀인러브', 반려동물과 운명의 짝을 찾는 SBS '펫미픽미', 서핑을 소재로 한 웨이브 '썸핑', 가상의 패션회사를 배경으로 펼치는 직장 로맨스 리얼리티 쿠팡플레이 '사내연애' 등이 개인 취향과 일상에 밀접한 색다른 연애 예능으로 이목을 끌었다.
차별점으로 '고수위'를 내세운 프로그램도 있었다. 쿠팡플레이 '체인리액션'은 8명의 남녀가 사슬에 묶인 채 밤낮을 보낸다는 설정이 가학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웨이브 '잠만 자는 사이'는 '자 보고 만남을 추구한다'는 MZ세대의 '자만추' 유행을 표방했으나, 실제 MZ세대의 사랑을 육체적인 관계로만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면서 부정적 여론을 피할 수 없었다.
시청층의 다양성을 꾀하기도 했다. MBN '다시 설렘, 캠핑 인 러브'는 5060 싱글들이 캠핑카를 타고 인생 2막을 함께 즐길 여행 메이트를 찾는 데이팅 프로그램이다. 출연자 연령이 높은 만큼 풋풋함보다 농익은 농담과 케미스트리로 중년 시청층을 다지고 있다. 웨이브는 LGBT 커플의 이야기를 담은 '메리퀴어'와 게이 출연자가 나선 '남의 연애'를 선보이며 성(性) 다양성을 소재로 사회적 화두를 던졌다.
◆ 세계에 통한 '우영우' IP -
드라마 한 편으로 이렇게 큰 힐링과 묵직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을까. 올해 방영된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그 어려운 걸 해냈다. 작품은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천재 변호사가 대형 로펌에 취업하며 일어나는 사건과 성장기를 다뤘다. 신생 채널에서 방영된데다, 자극적이지 않은 소재를 내세웠기에 방영 전에는 기대작으로 꼽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첫 회가 방영되자마자 입소문을 탔고 글로벌 OTT 넷플릭스에서도 21주간 비영어 TV 부문 톱10에 오르며 화제성을 입증했다.
작품은 자폐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 등 사회적인 화두를 던졌다. 순수한 주인공의 사랑과 성장기는 힐링을 선사했고, 대중은 '무해한 드라마'에 열광했다.
'우영우 신드롬'은 단순히 흥행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체 IP 확보의 중요성을 입증했다. '우영우'를 제작, 지분 100%를 가진 에이스토리는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제작 제안을 거절하고 자체 IP를 지켰다. 방영권만 구매할 수 있는 채널을 모색하다 신생 채널이자 KT스카이라이프의 자회사 ENA채널과 손을 잡았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작품이 잘 되자 동명의 웹툰이 제작됐고, 뮤지컬과 해외 리메이크까지 진행되고 있다. IP를 가진 덕에 수익성 면에서도 큰 성과를 거뒀다. 좋은 콘텐츠를 제작해도 프로그램과 함께 지적재산권을 전부 넘겼던 과거에서 벗어나 생존 기반을 다졌다.
예상치 못한 호성적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관련주가 떠오르기도 했다. '우영우' 제작사 에이스토리는 주가가 100% 이상 뛰면서 드라마 방영 보름만에 시가총액이 약 1500억 원가량 늘었다. 이후 주가가 하락하기도 했지만, 에이스토리는 '우영우'의 해외 리메이크, 웹툰, 뮤지컬, 굿즈 등 자체 IP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을 긍정적으로 내다 보고 있다. ENA 채널을 보유한 KT의 자회사 스카이라이프TV 역시 '우영우 신드롬'이 이어지던 당시 반짝 주가 상승 흐름을 타기도 했다.
◆ 마이너 장르 BL, 이젠 양지로 -
올해엔 마이너 장르로 여겨졌던 남성 간의 로맨스 BL 콘텐츠가 풍년이었다. 그간 간간이 웹드라마 시장에서 BL 콘텐츠를 다루긴 했지만, 올해엔 유명 배급사, 제작사들까지 BL 드라마 제작에 뛰어들었다.
특히 지난 2월 공개된 왓챠 오리지널 드라마 '시맨틱 에러'가 눈에 띄는 성과를 거뒀다.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은 극과 극 청춘들의 캠퍼스 로맨스를 다룬 이야기로다. 공개 직후 왓챠 1위를 차지하더니, 8주 연속 정상을 지켰고, OTT 콘텐츠 트렌드 1위에도 오르며 화제성을 입증했다. 특히 드라마가 흥행한 후 박재찬이 소속된 보이그룹 DKZ의 인지도가 급상승, 앨범 판매량이 기존보다 90배가량 늘면서 인기를 입증했다.
'시맨틱 에러'를 선봉으로, 올해 동안 스무 편에 가까운 BL 콘텐츠가 공개됐다. 그중 영화 투자배급사 NEW와 제작사 명필름도 BL 드라마 제작에 나서면서 BL 콘텐츠 시장의 파이가 본격적으로 커지는 모양새다. 게다가 기존엔 신예들이 꿰차던 BL 콘텐츠에서도 인지도 있는 스타들이 합류하고 있다. 배우 차서원과 B1A4 공찬은 '비의도적 연애담'에서 연인 호흡을 맞추고, 빅스 레오는 '펜스 밖은 해피엔딩'으로, FT아일랜드 출신 송승현은 '오 나의 어시님', B.A.P 출신 유영재는 '춘정지란'으로 연기 변신에 나섰다.
이처럼 2022년 방송가는 유사 포맷 속에서도 나름의 포인트를 담아 타깃 시청층을 노렸고, 차별과 편견에 대한 메시지, 그리고 도전을 입고 대중을 찾았다. 다양한 플랫폼에서 안방극장을 사로잡은 K콘텐츠들, 내년엔 또 어떤 작품들이 시청자를 울고 웃게 할지 기대가 쏠린다.
- 이우정 기자 lwjjane864@chosun.com
최신뉴스
Copyright ⓒ 디지틀조선일보&dizz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