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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정민은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에서 처음으로 남편의 역할을 했고, 아버지의 역할을 했다. 그의 부성애는 넘치지 않았고, 그렇다고 모자라지 않았다. 이를 통해 수많은 '보통 사람들'은 '지옥'에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만약 지옥의 고지를 받은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 지옥의 사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내 가족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박정민은 배영재 PD 역을 맡았다. '지옥'의 사자에게 당한 죽음은 '죄인이기에 마땅하다'라는 프레임이 씌워진 혼란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다. 새진리회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지옥의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대다수의 사람은 이를 믿고, 일부의 사람은 이에 조용히 속으로 반기를 든다. 배영재 PD는 이를테면 후자다.
"그냥 회사 다니는 직장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대한 재난이, 자연재해가 닥친 이 세상에서 다 필요 없고, 그냥 자기 할 일 하고, 그냥 회사 다니고, 피곤하고, 자기 가족이 제일 중요한, 어쩌면 저희 아버지 같은 사람. 평범한 직장인으로 먼저 접근을 한 거 같아요. 그런 평범한 사람에게 엄청난 일이 닥쳤을 때 그 보통 사람은 어떤 대처를 하고 반응을 하고 사건을 해결해나갈까. 이런 게 저도 궁금했고, 그렇게 접근한 것 같습니다." -
박정민은 원작 웹툰 '지옥'의 팬이기도 했다. 무려 원작 웹툰이 책으로 출간될 때 장문의 추천사도 남겼었다. 1~3부에 해당하는 내용만 본 상태에서, 연상호 감독에게 "나도 할래요"라며 들어왔다. 그리고 4~6부의 내용을 보았다. 박정민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그가 맡은 배영재 PD는 "이건 조금 곤란한데 싶을 정도로 평면적인 인물"이었다.
"'어떻게 해야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어요. 그래서 찾은 게 짜증인 것 같아요. 애드리브가 좀 많았죠. 그런데 짜증 내는 연기가 약간 화제가 되어서요. 짜증을 내지 않은 제가 나온 작품이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어요. 짜증을 안 낸 것도 꽤 많은데."
"사실 짜증 내는 거 보기 싫잖아요. 그런데 속 시원하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그래도 소정의 목적은 달성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감사드립니다. 넷플릭스에선 그걸 또 모아서 영상까지 만들어서 올려주셨던데, 넷플릭스에도 감사드리고 댓글 달아주신 분들도 관심 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정민은 '지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박정자(김신록)의 시연 장면"을 꼽았다. 원작 웹툰의 팬으로서 그는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사람이라는 건 생각보다 강하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나약하기도 해서요"라고 현실과 '지옥'이 닮아있다고 생각했었다.
"원작을 보고 드라마를 봤을 때, 큰 차이가 없어서 되게 좋았어요. 그런데 원작자가 연출하니, 사실 해치기도 쉽지 않죠. 그걸 고스란히 구현해내심에 박수를 쳐 드리고 싶었고요. 기억에 남는 장면은 만화를 보면서도 가장 좋아했던 장면인데요. 그 장면부터 달리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박정자 시연 장면. 이 작품의 메시지가 그 장면 하나에 다 담겨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웹툰을 볼 때도 그 장면이 되게 좋았고, 드라마 볼 때도 가장 좋았습니다."
처음으로 부성애 연기에 도전했다. 엄마 송소연(원진아)과는 다른 종류의 사랑이었다. 박정민은 "아이에 대한 감정은 송소연이라는 인물에게 집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요. 거기에서 저까지 감정적으로 젖어있으면 관객들이 보실 때 피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요"라며 자신이 아버지로서 적당한 선을 찾아가게 된 이야기를 전했다. -
"아버지 역할이 처음이죠. 제 실제 나이대를 연기한 것도 거의 처음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나름 새로운 경험이 었는데요. 부성애는 제가 알 수가 없어서, 죽었다가 깨나도 모르겠죠. 제가 경험해보지 않았으니까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하다가, 하다가 포인트를 잡은 게 '저희 가족에 대한 나의 사랑, 그 감정이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접근했습니다. '우리 부모님 중 한 분이 갑자기 그런 일이 생긴다면? 동생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생각부터 배영재에게 다가간 것 같습니다."
박정민이 출연한 영화 '사바하'(2019)와 '지옥'을 나란히 두고 보는 이들도 있다. 두 작품 모두에서 신흥 종교가 등장하지만, 박정민은 다른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사바하'랑 '지옥'을 비교하시는 분들이 더러 계시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런데 제 입장에서 두 작품은 다른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바하'도 사실 종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현실의 은유로 해석하면 충분히 또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그 두 작품이 비슷했다고 생각하진 않았고요. 그런 영화에 개인적인 흥미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연출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걸 확실하게 던져주는 영화를 좋아하고요. 그 안에서 연기할 수 있음을 행복해합니다." -
행복해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한 감독들을 비롯해 동료 배우들은 '박정민이 연기를 잘한다'라고 칭찬을 이어가곤 한다. 에세이집을 쓴 작가이기도 하고, 왓챠 프로젝트 '언프레임드' 속 단편영화 '반장선거'를 통해 감독으로서도 활약했다. 도대체 박정민의 비어있는 시간에는 어떤 것으로 채워져 있을까.
"저 자신이 정말 너무 한심해졌을 때쯤 일어나 뭔가를 하는데요. 그때 가끔 글도 쓰고요.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다양한 걸 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특별한 걸 하진 않고요. 시야는 어느 정도 넓어진 것 같아요. 제가 영화를 10년 동안 찍어오면서 몰랐던 부분을 단편영화 하나 찍었다고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정말 몰랐던 부분들이 많더라고요. 심지어 영화를 전공한 사람인데도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모르는 부분이 많았고, '감독님들께서 정말 고생을 많이 하시고, 정말 많은 선택을 하시고, 그에 따른 책임의 무게도 상당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배우로서 '감독님 말씀을 잘 들어야겠다'라고 생각했고요. 감독님의 머리에는 영화가 어느 정도 그려져 있을 텐데, 그 그림을 크게 헤치는 연기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