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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질문은 처음 받아봐가지고."
당황하는 모습이 보이더니, 눈물이 흘렀다. 화상으로 진행된 인터뷰 화면 속 배우 김선영의 모습에 뭔지 모를 뜨거움이 전해졌다. 영화 '세자매'는 그런 영화다.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 그리고 누군가의 자매이자 남매로 살아온 모든 이들이, 심지어 이를 연기한 배우조차도 이야기를 꺼낼 때 눈물과 웃음이 나게 하는 영화다.
영화 '세자매'는 제목처럼 세자매의 이야기를 담았다. 소심덩어리 첫째 희숙(김선영), 가식덩어리 둘째 미연(문소리), 골칫덩어리 셋째 미옥(장윤주)이 한 자리에 모이기까지 살아온, 그리고 견뎌온, 삶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
김선영은 희숙 역을 맡았다. 서있을 자리 없이 비좁은 꽃집을 운영하는 희숙은 꽃집처럼 마음 둘 곳이 없는 인물이다. 돈이 필요할 때 말고는 얼굴을 볼 수 없는 남편(김의성)과 어떤 뮤지션에게 빠져서있는 딸 보미(김가희), 그리고 돈을 갚지 못해 미안한 두 여동생. 어느 한 곳에도 마음둘 곳이 없는 인물이다.
"힘든게 너무 일상화 되어잇는 사람에게는 무감정이라는 상황이 있다고 하잖아요. 자기가 힘든 줄도 모르고, 본능적으로 웃고 있고. 조금 힘들어지면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나는 괜찮다, 잘못했다'고 하고요. 상대에게 어서 빨리 자신을 낮춰버리는 것이 희숙의 방어기제였던 것 같아요. 늘 그렇지는 않지만, 그런 순간이 있잖아요. 그 순간이 극대화된 거죠."
"그래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실 누구보다 행복한 인물이죠. '미안하다'하면 끝나니까요. 그런데 그걸로도 대처가 안되는 순간에 자해도 하게 되는거죠. 스스로 '힘들다'고 인지하는 순간이요." -
김선영은 작품 속 인물을 맡으면, 그 인물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신고, 어떤 걸음걸이로 다니는지. 그 외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것에 대한 방향이 잡히면, 그 다음부터는 직진이다. '세자매'의 희숙에게도 그랬다.
"진짜 주관적이에요. 친구, 선배, 지나친 사람들, 에브리띵(everything). 김선영이 살아온 46년의 인생 데이터 안에서 조합해서 룩이 완성이 돼요. 그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내가 동의할 수 있을 때까지."
"제가 영덕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20년을 살았거든요. 생선 팔고 이런 되게 작은 시장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마주쳤던, 분명히 동네 사람이 아닌 어떤 외지인같은 아주머니가 떠올랐어요. 쓸쓸해보이기도 하고요. 남들은 잠바나 고쟁이를 입고 온다면, 이 분은 화려하지는 않은, 시장에서 8천원에서 1만 2천원 정도 주고 살 수 있을 법한 정장바지 같은 걸 입고 다니셨어요. 자켓도 잠바보다 저렴해보이는 것을 입고요. 그 아주머니가 떠올랐어요." -
'세자매'는 김선영이 주연으로서 배우 문소리, 장윤주와 나란히 이끌고 간 작품이기도 하다. "먹고 사는 문제만 없으면 '세자매'같은 영화만 계속 찍었으면 좋겠어요"라는 것이 김선영의 대답이다.
"저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진 배우가 아니라서요. 남편이 감독인 덕분에 이런걸 하는거지, 아직 그 깜냥이 아니니까요. 다시 없을 기회였죠. 셋이서 하루하루가 지나가는게 아쉬웠어요. 한 1년 찍고 싶었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진짜. 재미있고." -
김선영은 실제로도 엄마이기도 하다. 그리고 엄마로 사는 희숙을 연기하기도 했다. 엄마로 사는 희숙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딸을 위하고 사랑하는 엄마다. 하지만 딸과의 제대로된 소통은 영화 속에서 비춰지지 않는다. 오히려 딸의 눈치를 보는 듯한, 엄마다. 김선영은 '엄마 희숙'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대답을 하기 전 김선영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좀 아픈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아요. 희숙은 좋은 엄마 같지 않아요. 엄마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제일 좋은 교육은 '딸에게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교육은 '엄마의 행복이다'라는 말이 있듯 말이죠. 딸의 불행에는 엄마의 불행이 있다고 생각해요."
"전 딸에게 되게 행복한 엄마이고 싶어서, 제 행복을 위해 사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희숙은 불행을 느끼게 한 것 같아요. 딸은 자신도 모르게 불행을 답습했고요. 딸에게 불행을 전수한 엄마이지 않나. 슬프죠.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
'세자매'는 김선영의 남편이자 함께 10년 넘게 극단 '나베'를 운영해온 이승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다. 그 두 사람이 '세자매'를 통해 가족이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많은 이야기, 많은 의미가 세자매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김선영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일까.
"가족은 가족이잖아요. 끊어낼 수가 없어요. 사랑하는 테두리입니다. 이렇더라도 끊어낼 수가 없잖아요. 그게 어찌보면 굴레일 수도 있고요. 가족이라는 자체가 폭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만나는 악마가 부모다라는 교육학자의 말도 있어요. 대학교 때 들은 말인데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가족은 이미 끊어낼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이 관계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는 나의 선택과 가치관의 문제인거죠.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내 가족이 가장 행복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김선영이 '세자매'를 통해 관객에게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뭘까.
"예전에 '데미안'이라는 소설을 처음 읽고, 몸이 앓아 누울 정도로 좋았던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 읽으면 또 다르거든요. 같은 작품이라도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것이 달라요. 그렇듯 같은 작품이라도 관객마다 느끼는 지점이 다를 것 같아요. '내가 가장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게 인간인 것 같거든요. 내 손톱 밑의 가시가 가장 아픈거잖아요. 본 모든 관객들이 '그렇구나,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나만 힘들고 맺혀있고, 풀지 못 한 숙제가 있는게 아니구나.' 이런 걸 느끼시면 좋겠어요. 인생이 꼭 힘들라는 법도 없고요. 힘들지 말라는 법도 없고요. 함께 살아가는 거니까요."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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