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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반도'에서 민정 역을 맡은 배우 이정현 / 사진 : NEW 제공
배우 이정현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그 길이 유난히 예뻤다. 배우 강동원은 이래서 이정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천사 같은 분"이라고 표현 했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꽃잎'으로 배우 이정현을 처음 마주하고 받았던 강렬함, 가수 이정현의 '와' 무대를 보고 받았던 충격, 여기에 가려졌던 진짜 '이정현'의 모습은 소담한 꽃처럼 참 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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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 영화 '꽃잎' 스틸컷
배우 이정현의 시작은 영화 '꽃잎'(1996)이었다. 80년 5월의 이야기를 몸에 담아 미쳐버린 소녀 역을 맡았다. 당시 이정현의 나이 16살이었다. 필름으로 촬영하던 시기였고, 실수가 돈으로 직결됐다. 모두가 예민했다. 첫날 연기를 너무 못해서, 장선우 감독은 촬영을 접었다. "무서워서 너무 많이 울었던 시절"이라고 이정현은 기억했다.
미친 소녀처럼 살면 그걸 연기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촬영 이틀 전에 촬영지에 가서 동네를 배회하고 다녔다. 그러면 인정 많은 시골 아주머니들이 수돗가에 데려가 씻겨 주시기도 하시고, 집에 데리고 가셔서 음식을 차려 주시기도 했다.
"영화 '꽃잎' 마지막 장면에 장터에 소녀가 앉아있고, 사람들이 그 앞에 이것저것 놓고 가시거든요. 그게 몰래 찍은 장면이었어요. 사람들이 진짜 정신 나간 아이인 줄 알고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저는 '꽃잎'에서 어두운 아이였고, 웃을 수도 없었고, 상처 난 연기를 어떻게 할 줄 모르니까 상처도 직접 내고, 이렇게 표현하면 되나. 그런 생각들을 하며 현장에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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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 영화 '파란만장' 스틸컷
그렇게 힘들었는데도, 영화가 너무 좋았다. '꽃잎'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그때의 이정현은 너무 어렸다. 이후, 역할이 들어오지 않아 힘이 들었다. 시간은 흘렀고, 성인이 됐다. 음악이 좋아 무대에 서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좋은 작품도 들어올 줄 알았다. 다시 관심은 가졌다.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가수 이미지가 너무 강했다.
"되게 목말랐어요. 박찬욱 감독님을 어떤 자리에서 만나게 됐는데, 대뜸 왜 은퇴했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게 아니고, 작품이 안 들어온다고. 그렇게 말씀드리니, 굉장히 놀라셨어요. 그리고 함께하게 된 작품이 '파란만장' 이었어요. 좋은 결과가 있었죠. 다행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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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스틸컷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도 박찬욱 감독님의 추천이었어요. 사실 그 전에 회사에 제안이 왔었대요. 그런데 회사에서 제가 자꾸 영화를 노개런티로 찍으니까, 저 몰래 거절을 했었던 거죠. 그러다가 박찬욱 감독님을 통해서 알게 됐고, 합류하게 됐어요. 저는 힘든 일이 생기면 박찬욱 감독님께 전화해서 여쭤봐요. 저한테는 정신적 지주시고, 좋은 멘토시고, 결혼식에서 축사도 해주셨어요."
이정현은 영화가 너무 좋아서, 좋은 작품이 있으면 노개런티로 출연했다. 그렇게 출연한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제36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안겨줬다. 당시 이정현은 "수상소감을 전혀 생각 못 했다, 너무 작은 영화라"라고 말하며, 목이 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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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 'V(브이)' 뮤직비디오 화면 캡처
연상호 감독과의 첫 만남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나오기 1년 전인 2014년이었다. 두 사람은 KT&G '제8회 대단한 단편영화제' 심사를 맡았다. 이후 연상호 감독은 계속 연락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정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떻게 지내냐"고 묻고는 "저랑도 같이 하셔야죠, 시나리오 보낼게요. 민정 역입니다"라고 했다.
그렇게 이정현은 영화 '반도'와 만나게 됐다. 다시 박찬욱 감독과의 만남으로 조금 돌아가 보자. 이정현은 좀비에 관심이 많았다. '시대를 앞서간 탑골 가가(탑골공원+레이디 가가의 합성어인 ‘탑골 가가’는 가수 이정현의 파격적인 무대로 붙여진 별명)' 답게 지난 2013년에 좀비 컨셉의 뮤직비디오 'V(브이)'를 발표했다. 무려, 박찬욱 감독과 박찬경 감독이 연출을 맡은 뮤직비디오다.
“’반도’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폐허가 된 대한민국의 모습과 업그레이드된 좀비들. 더 빨라지고, 관절도 심하게 꺾고, 그런 비주얼도 좋았고요. 제가 좀비물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브이’를 찍고 ‘부산행’ 소식을 듣고선, 한국에 좀비영화요? 라며 엄청 좋아했었어요. 그래서 ‘반도’ 촬영 현장에서도 일찍 가서 분장할 때부터 구경하고 그랬어요. 저는 좀비 중에 K좀비가 가장 멋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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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반도' 스틸컷 / 사진 : NEW 제공
순수하게 박수를 보내는 이정현이다. 사실 ‘반도’ 속 민정 역은 이정현의 모습에 많은 부분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정은 많은 이야기를 품은 인물이다. 서대위가 민정과 마주하며 “오랜만이야, 민정씨”라고 인사하지 않나. 연상호 감독은 이정현에게 한 줄로 민정을 설명했다.
“민정은 631부대의 짐승 같은 소굴에서 내 아이들과 미쳐버린 사단장을 데리고 탈출한 거죠. 여기서부터 민정 가족 얘기가 시작이 됩니다.”
배우 이정현이 영화 ‘꽃잎’에서 보여준 강렬함,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보여준 강인함, ‘명량’에서 보여준 생존력, 여기에 모성애가 더해졌다. 민정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이 이정현에 녹았다. 이정현은 민정 역에 대해 연상호 감독에게 하나만 확인했다.
“민정이 전사가 되어버린 것이 아이들 때문이죠? 전투력이 모성애에서 나온 거죠?”
“연상호 감독님이 맞다고 하셨어요. 그 한마디 확신을 들으니까 민정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들 공감할 수 있겠구나. 자식이 이런 상황에 놓이면, 어떤 어머니라도 전사가 될 거예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아요. 어머니들이 ‘공감했다’는 반응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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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반도'에서 민정 역을 맡은 배우 이정현 / 사진 : NEW 제공
가수도 배우도 아닌, 사람 이정현은 5녀 중 막내로 자랐다. 엄마는 주말마다 친척들과 동네 아주머니들을 불러서 잔치 음식을 하시는 부지런한 성격이셨다. 김장 때는 300포기의 김치를 담가 가족과 나눴다. 엄마와 막내딸, 이정현이 함께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한국인의 밥상’을 보는 시간이었다. 가족은 이정현의 힘이었고, 배우이자 가수 이정현을 붙잡아주는 원동력이었다. 민정이 가능한 이유기도 하다.
“결혼 전에도 가족이었는데, 결혼하고 나니 더 가족인 것 같아요. 결혼하고 부모님을 더 생각하게 되었고요. 신랑의 부모님, 저에겐 시어머님, 시아버님도 가족이 되었고요. 편안하고 좋아요. 제가 잘 안 되어도, 항상 옆에 있어 주는 분들이잖아요. 그게 되게 마음이 편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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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반도'에서 민정 역을 맡은 배우 이정현 / 사진 : NEW 제공
든든함과 편안함, 배우이자, “은퇴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수인 이정현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다.
“목표 없어요. 20대 때는 항상 목표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너무 괴로웠어요. 상처도 많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고요. 저는 그냥 나이 들 때까지 연기하는, 시나리오를 받을 수 있는 배우였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조심스레 러브콜을 보내 본다면 윤가은 감독을 꼽는다. 독립영화 ‘우리들’(2016), ‘우리집’(2019) 등의 작품을 통해 소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이야기해온 감독이다.
“윤가은 감독님, 너무 좋아해요. 꼭 이렇게 얘기하면 제안이 안 들어오던데. 계획대로 항상 안 되니까요. 그런데 ‘콩나물’ 때부터 너무 좋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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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반도'에서 민정 역을 맡은 배우 이정현 / 사진 : 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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