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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요 부문 4개를 수상하며 전세계 주요 뉴스가 되고 있는 가운데, 그의 이전 작품들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그 중에서 봉준호 감독의 첫 작품인 ‘플란다스의 개’는 VOD 스트리밍 플랫폼 왓챠플레이에서 시청량이 9.9배나 증가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하지만 제목이 왜 '플란다스의 개'인지 플란다스는 어디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또한, '플란다스의 개'는 봉준호 감독의 첫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슬픈 결말의 동화의 제목과 동일하다. 이 두 가지 작품에 등장하는 플란다스는 어디일까? 봉준호 감독 같은 디테일을 중시하는 예술가가 왜 플란다스를 선택했는지 가늠해보기 위해 플란다스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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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다스는 국가 이름이나 도시명이 아니다. 벨기에의 일부 지역을 일컫는 명칭이다. 벨기에 수도이자 정치, 행정의 중심지로 잘 알려진 브뤼셀(Brussels)을 비롯해 다이아몬드의 수도로 알려진 안트워프(Antwerp), 유럽의 중세 도시 겐트(Gent), 음악과 역사의 도시 메헬렌(Mechelen), 유럽 학문의 도시이자 벨기에 대표 맥주의 본거지인 루벤(Louvain) 등이 모여 있는 북부 지역을 플란다스(Flanders) 또는 플랜더스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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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플란다스의 개’의 실제 배경이 되는 도시는 안트워프다. 재미 있는 것은 안트워프야 말로 중세부터 현재까지 천재성과 창의성 그리고 디테일까지 갖춘 거장이자 이른바 마스터라고 부르는 장인들의 도시라는 점이다.
봉준호 감독이 이런 사실을 알고 일부러 본인 첫 영화 제목에 플란다스를 넣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플란다스의 개’ 배경 도시인 안트워프가 배출한 천재적인 예술가들 만큼이나 봉준호 감독 역시 천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동화 '플란다스의 개' 주인공 네로가 존경한 천재적인 예술가 루벤스 -
봉준호 감독이 21세기 천재 영화인이라면 루벤스는 17세기 천재 미술가로 명성을 떨쳤다. 안트워프는 자기 도시를 ‘루벤스의 도시’라고 자랑하고 있을 정도로 이 거장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높다.
루벤스의 작품은 역동적인 구성 뿐만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디테일한 인체 묘사, 극적인 표현력, 생생한 색감으로 초상화와 풍경화, 종교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으며, 이후 유럽 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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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는 또한 ‘플란다스의 개’ 주인공 네로가 가장 존경하는 화가였으며, 동화 마지막 부분에 성당안에서 네로가 죽어가면서 봤던 루벤스의 명화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예수’는 여전히 안트워프 대성당 안에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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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밖에는 네로와 그의 애견 파트라슈의 조형물도 있다. 루벤스와 가족이 살았던 대저택 ‘루벤스 하우스’에는 그의 작품 뿐만 아니라 그가 모은 수많은 미술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의 발자취와 작품들은 안트워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전세계 다이아몬드의 80%가 거래되는 안트워프 -
유명한 헐리우드 영화인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에서 주인공 마릴린 몬로는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노래했다는데, 그런 의미에서 안트워프는 여자들이 가장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는 다이아몬드의 천국이다.
지난 500년간 전세계 다이아몬드는 거의 안트워프를 통해 거래되었으며, 지금도 전세계 다이아몬드의 80%가 안트워프에서 거래된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 원석을 절묘하고 디테일 하게 커팅하는 혁신적인 기술을 처음으로 개발한 사람들이 바로 안트워프 장인들이며, 새로운 차원의 이런 커팅 기술을 ‘안트워프 컷(Antwerp Cut)’이라고 부른다.
현재 안트워프에는 수많은 다이아몬드 판매 매장이 있으며, 다이아몬드 분야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사람들이 대략 3만명이나 있다. 안트워프의 정부 기관 중 하나인 항만청 건물 역시 다이아몬드 형상이며, 심지어 다이아몬드 박물관(DIVA)도 있다.
안트워프의 또 다른 자랑, 초콜릿 -
“인생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네가 무엇을 고를지 아무도 모른단다” 아카데미 상을 받은 또 다른 영화이자 많은 이들의 인생작으로 불리는 ‘포레스트 검프’의 명대사 중 하나다.
영화에서 보여주듯 다양한 속을 넣은 초콜릿을 최초로 만든 곳이 바로 벨기에 플랜더스다. 플랜더스 전역에는 약 2천개 정도의 수제 초콜릿 매장이 있는데, 가장 독창적인 초콜릿을 맛보고 싶다면 안트워프로 가면 된다. 루벤스 만큼이나 초콜릿 분야에서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도미니크 페르소온이 활동하는 곳 역시 안트워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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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을 직접 만들어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초콜릿 장인과 함께 하는 초콜릿 워크샵이나 초콜릿 전문가와 함께 주요 매장을 돌며 시음하는 초콜릿 도보 여행도 쉽게 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안트워프 거리를 걷다 보면 초콜릿은 먹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도미니크가 개발한 초콜릿 페인트에서부터 초콜릿 립스틱, 초콜릿 약, 초콜릿 구두, 초콜릿 조각품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창의적인 초콜릿 세계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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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의 도시답게 매년 3월이 되면 안트워프는 그야말로 초콜릿의 도시로 변모한다. 안트워프 초콜릿 위크(Antwerp Chocolate Week)라는 축제 덕분이다.
안트워프의 주요 명소를 돌아보며 초콜릿 시식 경로를 따라 30개 이상의 현지 수제 초콜릿 장인들의 매장을 방문하고 이들이 만든 개성 있는 초콜릿을 한자리에서 음미할 수 있다.
세계 패션의 다크호스 안트워프 식스 -
이번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기생충’ 만큼이나 큰 기대와 언론을 장식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배우들이 입고 나타나는 패션이다. 영화제에 참석하는 배우들은 자신들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개성 있는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경쟁하는데, 최근에 이런 패션계에서 창의성으로 주목받고 있는 디자이너들이 바로 안트워프 출신들이다.
그 출발은 ‘안트워프 식스(Antwerp Six)’로 불리는 디자이너 6명이다. 1980년대 초반 안트워프 왕립 예술학교를 졸업한 6명이 트럭을 빌려 자신들이 디자인한 작품들을 싣고 런던 패션 위크에 참석하면서 이들의 디자인 작품들이 주목 받기 시작했다. 이들의 성공은 기존의 패션과 차별되는 자신들만의 과감하고 혁신적이며 독창적인 디자인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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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프랑스, 이태리는 디자이너 이름들이 널리 알려진데 비해 안트워프 식스 디자이너 6명의 이름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트워프 식스’로 알려진 덕분에 전세계 패션계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안트워프 자체를 전세계 패션 분야에 알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주제의식과 디테일은 건축의 생명 -
영화 ‘기생충’에서 많은 찬사를 받은 것 중 하나가 치밀하게 만들어진 세트장이다. 세밀하게 만들어진 세트장은 영화의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표현했다는 찬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안트워프의 건축 역시 주제의식과 디테일에 있어서 세계적인 찬사를 받고 있다.
철도계의 성당으로 불리는 안트워프 중앙역은 물론이고, 다이아몬드의 도시라는 명성에 맞게 한 눈에 그 주제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항만청 역시 유명한 건축물이자 관광 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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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에 자리잡고 있는 또 다른 건축물 MAS 박물관은 네 방향에서 보는 광경이 각각 다르고, 내부 역시 층마다 개성 있게 조성되어 있는 건축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안트워프는 유럽의 현대 건축 투어 여행지로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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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상 기자 jsf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