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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가씨',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가녀린 희생자는 기모노를 입고…

기사입력 2016.06.08 14:21
2016년 6월 1일 개봉
감독 박찬욱 | 출연 김민희·김태리·하정우·조진웅
  • 히데코의 집은, 반은 유럽식이고 반은 일본식이다

    히데코의 집은, 반은 유럽식의 성 같은 저택이고 다른 반은 ‘료칸’을 연상시키는 일본식의 전통 가옥이다. 조화롭게 섞인 반반이 아니라 칼로 자른 듯이 한쪽은 유럽식, 다른 쪽은 일본식, 두 채의 집이 딱 붙어있는 모습이었다. 강한 이질감이 스크린을 뚫고 나올 듯했다.

    그 이질감을 연출자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원작(‘핑거스미스’ 사라 워터스 作)을 읽은 후 영화를 보는 필자에게 이 히데코의 저택은 약간은 기이한 인상을 남겼다. 저택은 마치 책과 필름을 풀로 이어 붙인 것 같았다.

  • 영화 '아가씨',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가녀린 희생자는 기모노를 입고…
    원작은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세기 영국 런던 중심가의 더러운 뒷골목과 외곽에 고립된 대저택을 오가는, 제법 스케일이 큰 이야기다. 산업혁명이 한창인 유럽의 중심을 공간으로 한 이 이야기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와 어떻게 만나야 했을까. 소설 ‘핑거스미스’에 매혹된 박찬욱 감독으로서는 가장 큰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에게도 고민은 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 ‘핑거스미스’를 이미 읽어버린 것이다. 이전에 원작이 있었던 다른 영화를 볼 때는 원작과 영화를 따로 떼어놓고 감상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아가씨’는 좀체 원작과 영화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순수하게 영화만을 가지고 리뷰를 할 수가 없다. 이 점은 영화에 상당히 미안한 부분.

  • 영화는 중반부터 정갈하고 아름다운, 극강의 '변태미학'을 선보인다

    영화는 원작의 거의 절반만을 따른다. 나머지 절반은 다 바꿔버렸다. 히데코의 저택이 한 번 더 오버랩 된다. 영화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3부로 구성돼 있는데 2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원작과 달라지더니 박찬욱 나름의 ‘변태 미학’을 제대로 선보인다. 너무 정갈하고 지나치게 아름다워 ‘이 변태야!’, 욕을 할 수도 없다.

    원작에서는 릴리 삼촌의 비밀이 은근히, 그리고 학술적으로 설명된다. 구체적인 장면 묘사는 거의 없다. 정황이나 분위기로도 삼촌의 남다른 취향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아가씨’는 코우즈키의 ‘극강 변태성’을 설명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가녀린 희생자는 기모노를 입고, 가채를 쓴 채 간드러진 목소리로 1인극을 펼친다. 영화는 변태 가학성을 더욱 충분히 담아내기 위해 이모(문소리) 캐릭터를 추가해야 했고 코우즈키의 ‘지하실’도 만들어야 했다.

    일각에서 왜색 논란이 일고 있다고 하는데, 일반적인 편견을 조금 작용시키면 이러한 변태 미학을 선보일 때 왜색만큼 잘 어울리는 이미지가 또 있을까. 그런 면에서 ‘아가씨’의 무대가 1930년대 일제 치하 조선이라는 점은 나름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 영화는 원작의 작가가 꼼꼼하고 차분하게 써 내려 간 매혹적인 활자들을 박찬욱식으로 생생히 살려놓으려고 영상의 막강한 권력을 십분 활용한다. 여기엔 혼신의 촬영, 미술, 의상, 소품이 총동원된다.

    결벽증처럼 느껴질 정도로 정확하게 표현된 코우즈키의 서재, 특히 낭독회의 무대가 되는, 다다미가 깔려 있는 실내 정원은 소름 끼치게 아름답다.

  • ‘은밀한 낭독회’를 숨죽이고 지켜보는 신사들이 모여있는, 무대의 반대편은 유럽풍의 연극무대 관객석을 떠오르게 한다.

  • 히데코가 입은 드레스들은 19세기 유럽 귀족의 기품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그 옆을 졸졸 따르는 하녀 숙희가 입은 옷은 조선의 여염집 아낙의 평상복과 다름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아한 상업영화를 가릴 듯 말 듯 원작의 활자가 아른거린다

    동서양의 이미지들이 푸른빛 공간에 어울려 왈츠를 추고 때로는 금을 갈라 서로 각자의 진영에서 제 것을 뽐내기도 한다. 이 기이한 박찬욱의 무대에서 배우들은 각 인물의 신념과 목표, 상황에 맞춰 정확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사랑과 분노와 순정을 노래하며 공연을 마친다. 결말은 통쾌하고, 분명하고, 잘 닫혔다. 7년 만에 한국 극장으로 돌아온 박찬욱 감독이 들고 온 이 ‘우아한’ 영화는 빼어난 한 편의 상업영화가 틀림없다. 충분히 즐길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원작의 활자들이 스크린을 가릴 듯 말 듯 여전히 아른거린다. 은근하고 아기자기하게, 그리고 긴 호흡으로, 유럽 땅 어딘가에 펼쳐진 두 여인의 연정이 스크린을 보고 있는 내내 바로 옆에서 읽히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영화에 미안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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