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비 사막 깊숙한 곳, 돈황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밍사산과 산웨이산(三危山) 사이를 흐르는 계곡을 끼고 약 1,600m에 이르는 기나긴 절벽에 벌집처럼 석굴이 조성되어 있다. 현존하는 석굴이 492개, 석굴 벽화의 전체 면적이 4만 5천여㎢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최대의 석굴 사원이다. 깎아지른 벼랑을 뚫고 만들어진 석굴에는 아름다운 벽화와 조각상들이 가득하다. 이곳이 바로 사막의 박물관이라 불리는, 돈황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킨 곳이다.
-
돈황의 뜻은 ‘타오르는 횃불’이다. 돈황은 과거에 오아시스로 유명했지만 현재는 석굴의 도시로 유명하다. 서기 366년,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5호 16국 중의 하나인 전량(前凉)의 승려 낙준(樂僔)이 이곳에 도착한 후 꿈에서 빛나는 구름에 싸여 있는 천 명의 부처를 보았다고 한다. 그는 불심이 깊고 부유한 한 여행자에게 안전한 귀향을 위해 석굴 하나를 완성하여 부처님께 봉헌할 것을 권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석굴은 그 후 수백 년 간 이어져 장관을 이루게 되었다.
오아시스인 돈황은 한나라 때부터 서역으로 나가는 관문이었다. 돈황을 떠나 다음 오아시스를 만날 때까지는 서쪽으로 약 100㎞ 정도를 더 가야 한다. 때문에 고대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으로 떠나는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여행 계획을 점검하고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였다. 돈황을 떠나 서쪽으로 가면 험난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이곳은 죽음과 직면할지도 모른다는 정신적 불안감과 육체적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최후의 다짐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실크로드를 통과하는 순례자, 상인, 군인 등은 자신과 일행의 성공적인 여정을 위해 이 석굴을 찾아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이다. 반대로 서역으로부터 중원으로 들어올 때는 사막의 공포로부터 벗어났다는 안도와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때로는 많은 돈을 희사하여 석굴의 중건을 돕기도 하였다. -
막고굴은 4세기부터 13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각 시대의 예술적 특징과 동서양의 교류를 통한 문화의 융합이 표현되어 있다. 막고굴이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제17호 석굴 입구 우측에서 우연히 발견된 장경동(藏經洞)에서 나온 유물들 때문이다. 장경동의 유래는 약 10세기에 이교도의 침입으로부터 주위의 사원에서 보관하던 문서와 미술품 등을 보호하기 위해 굴을 파고 각종 문서를 넣은 다음 입구를 봉해 놓았을 거라 추측한다.
1907년 영국의 스타인은 종이와 비단 위에 한자, 범어, 소그드어, 티베트어, 웨이우얼어 등으로 기록된 고문서 24개 상자와 회화, 자수 등의 고미술품 다섯 상자를 영국 런던으로 옮겼다. 1년 후 1908년에는 프랑스인 펠리오가 장경동에 직접 들어가 귀중한 문서들은 프랑스로 보냈다. 그리고는 상자 한 개 분량의 고문서를 가지고 북경으로 가 프랑스 대사관에서 자랑삼아 고문서 전시회를 열었다. 이 때서야 고문서의 가치를 파악한 중국 정부는 즉시 장경동을 폐쇄하고 잘 지키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스타인과 펠리오가 대량으로 유물을 훔쳐간 후에도 일본, 독일, 미국 등 당시 열강들의 탐험대가 유물을 빼내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쳐 많은 유물들이 세계 곳곳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
돈황의 막고굴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한사람이 바로 신라인 혜초(慧超)이다. 혜초는 인도의 불교 성지를 돌아본 후 돌아올 때 현재의 카시미르와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경유하여 파미르 고원을 넘어 카스, 쿠처, 이옌치, 투루판, 하미를 거쳐 돈황의 막고굴에 이르렀다. 혜초는 막고굴에서 자신이 서역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남겨 놓았다. 그의 여행 기록은 현재 14쪽, 약 6천자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인도, 아라비아 등지의 역사와 서역 각지의 종교와 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최신뉴스
이 기사는 외부제공 기사입니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