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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시저우랑(河西走廊)은 감숙성의 성도 란저우(蘭州)에서 우웨이(武威), 장예(張掖), 져우취앤(酒泉)을 거쳐 돈황(敦煌)으로 길게 이어지는, 치리앤(祁連)산맥의 북쪽과 허리산(合黎山), 롱서우산(龍首山)의 남쪽 사이에 동서로 1,000여㎞의 기나긴 협곡 길이다. 이 길은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통로 가운데 하나로, 황허(黃河)의 서쪽에 있는 긴 복도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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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시저우랑을 잇는 유서 깊은 도시에는 우웨이(武威), 장이예(張掖), 져우취앤(酒泉) 등이 있다. 그 중 우웨이는 중국이 자랑하는, 일명 나는 제비보다 빠르다는 동분마[銅奔馬, 마답비연(馬踏飛燕)이라고도 함. 높이 35㎝, 길이 40㎝. 1969년 중국이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방공호를 파던 중 우연히 발견한 지하 묘실에서 발견]가 출토된 곳이다. 동분마는 한 마리 말이 머리를 들고 꼬리를 휘날리며 뒷발로 나는 제비를 밟고 나는 듯 달리는 모습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다. 미국과 중국의 국교수립 때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복제품을 선물할 정도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고 있다.
장이예는 마르코 폴로가 1년 간 머물렀다고 기록한 곳이다. 마르코 폴로는 당시 감주(甘州)였던 이곳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주민들은 우상숭배자이지만 마호메트를 숭배하는 사람도 있다. 기독교들도 많은데 이 도시에 세 개의 크고 아름다운 교회가 있다. 우상숭배자들은 많은 사원과 수도원을 갖고 있고 엄청나게 많은 우상을 모신다.’ 여기서 우상 숭배자는 불교도를 의미한다. 그의 기록으로 볼 때 동서양의 종교가 서로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허시저우랑이 동서양의 문화를 수용하는 중요한 통로였음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
져우취앤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도 매우 흥미롭다. 한나라에 곽거병(霍去病)이란 장군이 있었다. 그는 어릴 때 매우 몸이 약하였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병이 물러가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거병이라 지었다. 그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건강하게 성장하여 한나라의 장군이 되어 흉노와의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병하였지만 기나긴 행군에 지친 군사들의 사기는 형편없었다. 이 때 황제가 곽 장군을 위로하기 위해 한 병의 술을 보냈다. 곽 장군은 모든 병사들을 사막의 오아시스로 모이게 하고는 황제가 보낸 술을 모두 물에 부었다. 그리고는 병사들에게 황제가 보낸 술을 마시라고 하였다. 그것은 한 병의 술을 부대원 전체가 맛볼 수 있는, 떨어진 사기를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도시를 ‘술의 샘’이란 뜻인 져우취앤(酒泉)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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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대도시들의 역사와 유래보다 더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가 있다. 허시저우랑이 중국 4대 미인 중의 하나인 왕소군(王昭君)이 흉노 왕에게 시집가던 길이라는 것이다.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元帝)의 궁녀였는데 기원전 33년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흉노 왕에게 보내졌다. 궁녀로 들어와 황제의 눈에 한 번도 들지 못했던 왕소군이 흉노 왕에게 보내지는 과정은 그야말로 소설이다. 흉노 왕이 한의 원제를 만나 한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하자 당시 흉노보다 힘이 약했던 한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한나라로서는 공주를 흉노 왕에게 시집보낸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 때 마침 흉노 왕의 눈에 연회에서 시중들던 한 여인이 들어왔으니 그녀가 바로 왕소군이다. 흉노왕은 왕소군에게 반하여 공주가 아니고 궁녀라도 좋다고 제안하자 원제는 마음에 드는 궁녀를 고르도록 하였다. 흉노 왕이 가리킨 여인을 바라본 원제도 왕소군의 미모에 빠져버렸다. 원제는 약속을 지키는 대신 혼수를 준비할 3일간의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왕소군을 자신의 처소로 불러 ……. 또한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린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참형에 처했다고 한다. 당시 화공 모연수는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황제가 맘에 드는 궁녀를 고르도록 도왔다. 그런데 모연수가 뇌물을 주지 않는 왕소군을 밉게 그려서 원제가 왕소군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는 황제를 기만한 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늙은 흉노 왕을 따라 허시저우랑을 지나가던 꽃다운 18세의 왕소군이 고향생각을 하며 비파를 뜯었더니, 날아가는 기러기가 미색에 빠져 날개 짓을 잊는 바람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왕소군을 낙안(落雁)이라고 불렀다. 왕소군은 흉노 왕에게 시집가 아이를 낳고 살다가 흉노 왕이 죽자 당시 흉노족의 풍습에 따라 다음 왕이 된 그의 적자(嫡子)에게 다시 시집을 가서 또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상당부분은 허구이겠지만 왕소군이 살아 있던 시기에는 실제로 전쟁이 없었다고 하니 흉노의 두 왕이 그녀의 포로가 되었던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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