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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를 벗어나지 못한 윤석민의 높이 뜬 타구는 평범한 플라이로 보였다. 2사 만루 끝내기 기회를 잡았던 넥센으로서는 아쉬움이 묻어있고, 패배 위기에 몰렸던 SK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는 타구로 보였다. 승부는 그렇게 10회 연장을 끝내고 11회 연장으로 넘어갈 것으로 보였다. 만일 15회 연장까지 이어진다면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치러지는 2015 KBO리그 와일드카드 결정전은 자정을 넘어 1박 2일 경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이 나왔다. 평범한 내야 플라이로 보였던 윤석민의 타구를 SK 내야수 중에서 아무도 잡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2루수 나주환은 1루 주자 서건창을 의식해서 적극적으로 달려오지 못했고 그나마 주자에서 자유로운 유격수 김성현이 달려왔으나 제대로 포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끝내기 실책. 11회까지 이어진 승부치고는 허망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양 팀의 에이스가 나선 경기 초반 분위기는 넥센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선두 타자 이명기를 낫아웃으로 내보낸 넥센 선발 투수 밴헤켄은 1루 주자 조동화를 견제로 잡으면서 스스로 위기를 넘긴 반면, SK 선발 투수 김광현은 7명의 타자를 상대하면서 4개의 볼넷을 내주는 최악의 컨디션이었기 때문이다. 1회에 김광현이 던진 공은 무려 31개에 달하기까지 했다. 비록 초반이기는 해도 다소 싱거운 승부가 예상될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좋지 않은 컨디션에도 불구하고 김광현이 대량 실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31개의 공을 던지고 4명의 주자를 내보냈지만, 실점은 단 1점에 불과했다. 1사 만루에서 5번 타자 유한준의 우측 방향 깊은 희생 플라이로 허용한 점수뿐이었다. 다시 2사 만루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7번 타자 박헌도를 좌익수 플라이로 잡아내면서 더 이상의 실점은 없었다.
반대로 넥센으로서는 흔들리는 김광현을 몰아치지 못했기에 아쉬움이 크게 남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2사 만루에서 박헌도가 공을 더 보지 않고 초구에 방망이를 낸 것은 결과적으로 김광현을 도와준 셈이 되고 말았다. 그 후 김광현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고 넥센 또한 추가점을 얻어내지 못하면서 승부를 쉽게 예측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4회까지 무안타로 막아낸 밴헤켄의 호투가 돋보이는 정도였다.
경기의 흐름이 바뀐 것은 5회 초였다. 밴헤켄의 구위에 눌려 무안타로 고전하던 SK 방망이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선두 타자 브라운의 좌측 솔로 홈런을 시작으로 박정권의 2루타가 이어졌다. 동점을 넘어 역전까지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SK에서는 희생 번트로 주자를 일단 3루까지 보내놓았다. 원아웃이므로 외야 희생플라이가 나오거나 내야 땅볼이라 해도 느린 타구라면 3루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이때 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8번 타자 정상호가 스퀴즈 번트를 시도한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허를 찌르는 장면이었다. 문제는 타자 정상호가 번트에 능한 것도 아니고, 발이 빠르지도 않은 포수라는 점이었다. 당황한 것은 넥센 측뿐이 아니라 같은 팀의 3루 주자 박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작전이 나왔다면 홈으로 달려들었을 텐데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점수도 내지 못하고 아까운 아웃카운트만 늘어난 애매한 상황이었다.
불길한 기운이 감돌 즈음 9번 타자 나주환의 좌중간을 가르는 3루타가 터졌다. 희대의 촌극과도 같았던 정상호의 번트를 잊게 만드는 호쾌한 장면이었다. 게다가 일이 잘 풀리려고 그랬는지 우익수 박헌도의 무리한 플레이에 이어 외야에서 중계되어 3루로 향하던 공이 나주환의 몸을 맞고 굴절되면서 타자 주자마저 홈을 밟았다. 1점에다 추가점까지 덤으로 얻는 행운이 따랐다.
후반으로 갈수록 다급해지는 쪽은 넥센이었다. 김광현의 제구가 난조를 보일 때 흔들지 못했던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게다가 행운의 여신마저 SK의 손을 들어주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던 경기의 흐름은 7회 말 다시 방향을 바꿨다. 서건창의 볼넷과 고종욱의 3루타로 1점을 따라붙은 넥센은 이택근의 느린 타구가 나오면서 끝내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행운의 여신은 11회에도 SK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1사 1루와 2루에서 김강민 대신 타석에 나섰던 박재상의 타구가 2루수 쪽으로 향했고 4-6-3으로 이어지는 병살로 이어졌다. 하지만 유격수 김하성의 송구가 정확하지 못해 병살처리 되지 못했고 끝냈어야 할 이닝을 끝내지 못한 채 넥센의 네 번째 투수 한현희의 폭투가 겹치면서 주지 않아도 될 1점을 거저 내주고 말았다. 승부를 결정짓는 결승점이 될 지도 모를 점수였다.
행운의 여신이 외면했다고 생각했으나 넥센에 기회가 찾아왔다. 선두 타자 유한준이 포수 파울 플라이로 물러나기는 했어도 김민성의 좌측 2루타가 나왔고 6회부터 박헌도 대신 타석에 들어섰던 스나이더의 우측 2루타가 이어졌다. 끝난 줄 알았던 경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섰고 2사 만루에서 끝내기 실책이 나왔다. 외면한 줄 알았던 행운의 여신은 결국 넥센의 편이었던 셈이다.
- 김도광 unm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