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사진집의 꿈 품은 더미북 245권…‘하우스 오브 포토그래피’가 그 무대가 됐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에 위치한 후지필름 하우스 오브 포토그래피 서울을 찾았다. 더미북 전시 마감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공간 안쪽 세미나실로 쓰이던 자리를 빼곡히 채운 것은 책이었다. 정확히는 245권의 더미북이다.
더미북은 정식 출판 전 단계에 만드는 실물 원형이다. 포트폴리오나 이미지 묶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 권의 사진집으로 완성됐을 때의 구조와 서사, 물성까지 구현한 결과물로, 어떤 사진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지, 판형과 제본 방식은 어떻게 할지, 표지와 본문의 질감은 어떻게 설계할지까지 작가가 직접 결정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다.
완성된 사진집을 향한 설계도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작업물인 셈이다. 이번에는 각자의 방식으로 직접 만들어 온 것들이었다. 일반 단행본처럼 인쇄·제본된 것이 있는가 하면, 종이를 손으로 자르고 실로 묶어 만든 수작업본, 함께 보내온 박스까지 포함해 하나의 세계관처럼 구성된 것도 있었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붙여 넣은 것, 크기가 일반 책의 몇 배에 달하는 대형 판형도 눈에 띄었다. 어느 하나 같은 형태가 없었다.
후지필름 코리아가 올해 처음 기획한 '포토 더미북 어워드 2026'에 접수된 작품 수는 245건. 주최 측도 예상을 웃도는 수치라고 했다. 접수 기간이 두 달 남짓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사진집 출판을 향한 창작자들의 대기 수요가 적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현장에서 만난 한 출품자는 제본 수업을 계기로 직접 책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해외 더미북 어워드에 먼저 지원하면서 구상을 다듬어왔다. 이번 후지필름 코리아의 더미북 어워드 소식은 SNS로 접했다. "이미 만들어 놓은 게 있어서 지원했다"고 했지만, 제출용 2권을 따로 만드는 데 하루를 꼬박 쏟았다. 종이 자르고, 제본하고, 풀 굳히는 과정을 혼자 해냈다. "수작업으로 하는 게 더미북의 의미에 더 맞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에게 더미북을 만드는 이유를 물었다. "SNS에 올리는 것도 방법이지만, 사진집은 작업을 하나의 결과물로 세상에 내놓는 것, 마무리 짓는 느낌이 있어요."
더미북 관람 방식은 손으로 직접 책을 펼쳐보는 것이다. 전시장에는 작가의 작업 노트도 함께 놓여 있어 창작 의도와 과정을 함께 읽을 수 있다. 관람 후에는 방문객이 직접 투표에 참여할 수 있고, 이 현장 투표 결과가 최종 후보 20권 선정에 20% 반영된다. 인기상은 현장 득표 최다작 1권에 돌아간다.
하우스 오브 포토그래피 서울의 현장 매니저에 따르면, 평일에는 특정 작품을 찾아오는 목적형 방문객이 많고, 주말에는 가족 단위가 주를 이뤘다. "몇 번 작품이 어디 있냐"고 묻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온라인에서 정보를 확인하고 직접 찾아온 것이다. 사진 전문가가 아닌 일반 관람객도 전시를 둘러보다 자연스럽게 투표에 참여하는 모습이 이어졌다고 했다.
전시장 한켠에는 사진가 최랄라의 작품들이 걸려 있다. 촬영한 인물 사진 위에 직접 드로잉과 페인팅을 더하는 방식으로, 카메라를 기록 도구가 아닌 표현 도구로 접근하는 작업이다. 2016년부터 2026년까지 10년 치 작업이 함께 걸려 있다. 실내에서 볼 때와 외부에서 볼 때 다르게 보이도록 양면으로 설계된 작품도 있어, 지나가다 유리창 너머로 시선이 멈추도록 의도된 구성이었다. 최랄라의 작품은 오는 8월까지 전시된다. 인화된 이미지 위에 층위를 쌓아가는 이 작업은, 사진을 책의 형태로 재구성하려는 더미북 창작자들의 시도와 같은 맥락 위에 있다는 인상을 준다.
하우스 오브 포토그래피 서울은 런던·시드니·멕시코·상하이·홍콩에 이어 전 세계 여섯 번째로 문을 연 후지필름의 글로벌 사진문화 플랫폼이다. 지난해 10월 이태원에 오픈했다. 공간 설계에는 서까래, 창호지, 석판 등 한국 전통 건축에서 영감을 얻은 요소들이 곳곳에 스며 있다.
카메라 체험·구매 공간과 인스탁스 전용 코너 외에도, 큐레이션 포토북 라이브러리와 강의·세미나실을 갖춘 복합 문화 공간으로 운영된다. 강의는 사진뿐 아니라 미학, 영화학 등 다양한 주제로 거의 매주 열리며, 후지필름 카메라를 보유하지 않아도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더미북 어워드 기간 동안 강의는 일시 중단됐고, 그 자리를 245권의 더미북이 대신 채웠다.
전시는 10일 일요일 오후 8시에 종료된다. 이후 5월 중순 전문 심사 결과와 현장 투표 점수를 합산해 파이널리스트 20권이 선정되며, 6월 프레젠테이션과 시상이 이어진다. 1·2등 수상작은 출판사 보스토크 프레스와 협업해 각각 2,000만 원, 1,500만 원의 제작지원비로 정식 출판까지 이어진다.
국내에서 사진집 한 권을 정식으로 내는 일은 대부분의 창작자에게 여전히 먼 이야기다. 더미북 어워드는 그 거리를 좁히는 실질적인 경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