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진은 낙관, 환자는 신중” 의료 AI 신뢰 격차, 비용·책임 해법이 관건
짧은 진료, 높은 비용, 불명확한 책임…한국 의료 AI의 신뢰 과제
헬스 테크놀로지 기업 필립스코리아(대표 최낙훈)가 27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발표한 ‘미래건강지수(Future Health Index) 2025 한국 보고서’는 헬스케어 AI를 둘러싼 한국 의료 현장의 현실을 보여줬다. 의료진의 86%는 “AI가 환자 치료 결과를 개선할 것”이라고 낙관했지만, 환자의 긍정 응답은 60%에 그쳤다.
보고서와 현장 발표에서는 짧은 진료 시간, 상급병원 중심 도입, 초기 비용, 불명확한 법적 책임이 신뢰 격차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결국 AI 신뢰 구축은 기술이 아니라 비용과 책임 해법 마련에 달려 있다는 점이 강조됐다.
보고서에 드러난 한국 의료 현실
올해로 발간 10주년을 맞은 필립스 ‘미래건강지수 보고서’는 헬스케어 시스템이 직면한 과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혁신 기술, 앞으로의 방향성을 조망하는 글로벌 조사다. 이번 보고서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16개국에서 1,900명 이상의 의료 전문가와 16,000명 이상의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특히 헬스케어 AI에 대한 의료진과 환자 간 신뢰 격차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환자의 53%는 전문의 진료 대기를 경험했고 평균 대기 기간은 40일에 달했다. 환자와 대면 진료 시간은 평균 7분에 불과했으며, 환자 세 명 중 두 명은 5분 미만이었다. 의료진의 91%는 불완전하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환자 데이터로 인해 임상 시간이 낭비된다고 응답했다. 그럼에도 의료진의 86%는 헬스케어 AI가 환자 치료 결과를 개선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환자의 긍정 응답은 60%에 그쳐 뚜렷한 인식 차이를 보였다.
신뢰 격차, 제도가 만든 현실
짧은 대면 진료 시간과 긴 대기 기간은 환자들이 헬스케어 AI 도입을 신중하게 바라보는 배경으로 꼽힌다. 실제로 환자의 46%는 AI가 도입되면 의사와 마주할 시간이 더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환자들은 무조건 AI에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AI가 의료 과정에서 실수를 줄이고(50%), 비용을 절감하며(43%), 건강 개선에 실질적으로 기여한다면(40%) 신뢰할 수 있다는 응답도 나왔다.
이번 보고서의 한국 의료진 표본은 100명으로, 이 가운데 80% 이상이 상급종합병원 근무자였다고 필립스코리아는 밝혔다. 전체 의료진 규모에 비해 적은 표본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이는 의료 AI 솔루션이 실제로 대형 병원 위주로 도입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은경 용인세브란스병원장은 질의응답에서 “의료 AI 솔루션은 초기 비용과 인프라 문제로 처음에는 상급 병원 중심으로 확산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의료 AI 도입 비용은 병원 현장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다. 김 원장은 “AI 솔루션 초기 구축에만 25억 원이 소요됐고, 환자 동의 절차 때문에 오히려 인력이 더 필요하다”며 “간호사들이 ‘사람을 위한 디지털이 돼야 하는데, 디지털을 위해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문제는 정부가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법적 책임 문제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보고서에서는 국내 의료진의 74%가 “AI 오류 발생 시 법적 책임이 불명확하다”고 답했다. 현장에서는 “AI는 어디까지나 보조 도구이고 최종 판단은 의사에게 있다”면서도, 제도적 불확실성이 남아 있는 한 의료진과 환자 모두 불안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점이 강조됐다.
중환자실 사망률 감소, 확인된 성과
우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김 원장은 “의료 AI 모니터링을 적용한 이후 환자 사망률이 줄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용인세브란스병원은 의료 AI 솔루션 도입 후 중환자실 전원 환자 사망률이 1.5명에서 0.9명으로 감소했다고 보고했다. 환자 안전성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환자 기록 정리에 생성형 AI를 활용하면서 의료진의 문서 작업 시간이 최대 85% 줄어드는 성과도 있었다. 간호사와 전공의의 업무 부담이 줄어 환자 돌봄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환자 만족도 역시 개선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는 의료 AI가 단순 기대 수준을 넘어 실제 임상 현장에서 환자와 의료진 모두에게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과 확산 막는 비용과 책임
이 같은 성과가 의료 현장 전반으로 확산하려면 구조적 과제를 풀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됐다. 특히 초기 비용과 수가 지원, 법적 책임 범위 등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환자 신뢰가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필립스는 이번 보고서를 통해 헬스케어 AI 신뢰 강화를 위한 다섯 가지 제안을 내놨다. ▲사람 중심의 AI 설계 ▲인간-AI 협력 강화 ▲효능과 공정성 입증 ▲명확한 가이드라인 마련 ▲다양한 파트너십 구축이 그것이다.
필립스코리아 최낙훈 대표는 “헬스케어 AI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일은 혁신을 앞당기고 의료진과 환자 모두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한다”며 “국내 의료 현장에서 AI가 책임감 있고 포용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협력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낙관과 신중 사이, 제도 해법이 답
이번 보고서와 현장 발표는 하나의 메시지로 귀결된다. 헬스케어 AI 신뢰 격차는 기술이 아니라 제도와 현실의 문제라는 점이다. 86%의 낙관과 60%의 신중함, 26%포인트 차이를 좁히는 열쇠는 결국 높은 초기 비용과 모호한 책임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이번 보고서는 의료 AI 솔루션을 공급하는 필립스가 주관한 조사라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의료진 86%와 환자 60% 사이, 26%포인트 신뢰 격차를 선명하게 드러낸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다만 높은 초기 비용과 불명확한 책임 문제를 풀지 않는 한, 이 격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