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가 시작된 ‘그날’의 이야기
7일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3‧1운동의 거대한 불길은 사그라졌지만 독립을 향한 조선민중의 열망은 더욱 뜨거워져갔다. 대다수 독립 운동가들은 이러한 민족의 염원을 이끌 통합조직의 필요성을 깊이 실감한다.
1919년 4월 10일, 독립지사들은 상하이에서 새로운 정부를 구상하며 열띤 논의를 진행한다.
“여러분, 국호는 ‘대한민국’이 어떻겠습니까?”
“‘대한’은 일본에게 망한 나라인데 굳이 쓸 필요가 있습니까?”
“‘조선공화국’이나 ‘고려공화국’은 어떻소?”
밤새 이어진 이 회의를 통해 ‘대한민국’의 국호, 국회, 헌법이 정해지고,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가 시작된 ‘그날’로 돌아가 본다.
이승만은 美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민주공화제를 기반으로 한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화려한 인맥뿐 아니라 외교력까지 갖췄던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총리 취임을 앞두고 있었지만 이를 강력 반대한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신채호‘였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국무총리 취임을 둘러싼 신채호의 이의제기는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보낸 한 통의 청원서 때문이었다. 그 충격적인 청원서의 내용을 공개한다.
당시 임시정부는 상해, 연해주, 한성을 비롯해 실체 없는 전단 정부까지 포함하면 무려 8개에 달했다. 역량을 한데 모아 독립운동을 이끌 통합조직임시정부를 위한 협상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그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2위해 상하이에 도착한 한 사람, ‘도산 안창호’. 그는 어떻게 ‘임시정부’들을 통합할 수 있었을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이야기는 4월 7일 일요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