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에 즐기는 독특한 전통주 3종
한국의 술 문화하면 소주, 맥주 일색으로 보인다고 생각되지만, 본래 우리의 술은 계절을 담고 있다. 세수 확보를 목적으로 주류 제조를 장려했던 유럽이나 일본의 양조장 제도와는 달리, 집에서 술을 빚는 문화가 강했고,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재료와 , 그리고 허브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술을 빚는 이유는 간단했다. 손님 접대와 제사였다. 술은 집안의 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척도였다. 술을 빚는다는 것은 먹을 쌀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고, 빚을 만한 넓은 공간이 있으며, 일을 도울 일손이 풍부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술 맛마저 좋으면 여유가 넘치는 의미로 인식되었고, 그 때문에 집안의 격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좋은 술을 빚고자 노력을 했다.
이렇다 보니 술은 음식으로 인식이 됐고, 100일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 만들어진 최고의 음식인 술을 제삿날에 조상님께 바쳐왔다. 흥미로운 것은 종가의 경우 수도 없이 제사를 지내왔는데, 문경 호산춘을 빚고 있는 황희 정승의 가문 장수 황 씨는 1년에 제사를 50번이나 지낸다는 것이 좋은 예이다. 이렇게 50번이나 지내려면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술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술을 빚는 것은 집안의 살림권을 가진 어머님이었고, 계속 술을 만들 수 있게 며느리에게 문헌으로 그 비법을 남겨 놓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최초의 한글 조리서 안동 장 씨의 음식디미방이다. 이렇게 한국의 술은 집안의 술, 그리고 계절의 술과 최고의 음식으로 인정받던 문화였다.
그렇다면, 지금 시즌에 있어서 본래의 술맛은 어땠을까?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지금은 술이 맛있는 시기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실은 좋은 술이 슬슬 나올 때이다. 쌀쌀해진 날에 좋은 숙성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저온숙성이다. 그런 의미로 지금, 만추의 맛을 간직한 특별한 술 3종을 소개해 본다.
약청주 분야의 슈퍼 드라이 모월(母月)
한국의 술 하면 보통 인식되는 것이 단맛이라는 이미지이다. 대중성 있게 만들기 위해 감미료를 넣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단맛이 없는 술들은 지금의 한국의 주류시장에서 판매하기가 어려운 주종 중 하나다. 하지만 이렇게 달지 않은 술의 장점은 있다. 바로 음식의 맛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살려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단향이 적어서 원료의 풍미를 느끼기도 좋다. 이렇게 나온 약주가 바로 강원도 원주 ‘모월’이라는 술이다. 모월은 원래 치악산을 뜻하는 것으로 어머니처럼 뭇 생명을 다 품어주면서 달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어둠을 밝혀주는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농업인의 아들로 태어난 김원호 씨가 WTO 및 쌀 시장 개방에 있어서 직접 재배한 쌀로 지역의 문화와 전통주 문화를 알리고자 만들었다. 일 년에 2,000병 한정수량으로 제작하며, 맵쌀 100%에 100일 숙성, 100% 무감미료로 빚어진다. 일부러 단맛을 전혀 내지 않았는데, 강원도라는 지역 술인만큼 생버섯, 버섯볶음, 생표고 버섯, 양송이 볶음, 더덕 및 도라지 요리와 잘 어울린다. 참고로 이 모월 약주를 통해 알코올 도수 41도의 증류식 소주도 나오는데, 치악산 한우와의 조합이 특별하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구입할 수 있으며, 서울에서는 가로수길 개미집, 홍대 산울림 1992, 인사동 한식 다이닝 한식 공간 등에서도 취급하기도 한다. 단, 수량이 많지 않아 늘 재고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알코올 도수는 13%다.
원료를 아끼지 않은 술 순향주
한국 전통주의 특징은 덧술이라고 하여, 이른바 술 발효를 여러 번 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때마다 쌀을 더 넣어줘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고급술은 3번 정도를 발효시켜 삼양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발효 횟수를 거듭할수록 원료에 대한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향주의 경우 무려 5번을 발효시켰다. 전통주 용어로 이러한 술을 다섯 번 발효하여 오양주라고 부르는데, 한마디로 원료를 아낌없이 썼다는 의미이다. 1670년 안동 장 씨가 쓴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에 기록된 순향주법을 재현해서 빚었으며, 단맛 일색의 술이 아닌 좋은 쌀이 가진 풍미가 그대로 살아있는 모습이 이 술의 특징이다. 여주 쌀과 물과 누룩으로 40일 저온 발효, 이후 60일 숙성 등 총 100일의 기다림을 통해 만들어진다. 역시 인터넷 등에서 구입이 가능하며, 서울에서는 경리단길의 한국술집 안씨막걸리, 청담동 애류헌, 역삼동 우리술바 작, 홍대 산울림 1992, 마포의 삼씨오화 등에서 맛볼 수 있다. 알코올 도수는 15%다.
강원도 횡성의 햅쌀로 빚은 프리미엄 막걸리 ‘첫술’
앞서 소개한 두 전통주가 인터넷 또는 한식 주점에서 주로 맛볼 수 있는 술이라면 ‘첫술’은 마트 등에서 편하게 구입 가능한 제품이다. 국순당이 10년째 가을에만 선보이고 있는 햅쌀 막걸리 ‘첫술’은 국순당 횡성 양조장이 위치한 횡성지역의 햅쌀로 빚은 제품으로 최대한 신선함과 지역의 문화를 살렸다. 햅쌀로 빚으면 신선함이 느껴지는 것은 물론 막걸리 맛 자체도 부드럽게 느껴진다. 이유는 바로 햅쌀은 일반 쌀에 비해 이제 막 수확한 쌀인만큼 수분을 많이 함유하기 때문이다. 해당 제품은 전국에 총 6,000병만 한정 판매할 예정이며, 제품 판매처는 현대백화점 전통주 전문매장인 ‘주담터’와 전국 주요 대형 유통매장, 백세주마을 등이다. 한정 판매인 만큼 이미 재고가 소진된 곳도 많으니 꼭 확인하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전통주를 지켜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며
봄의 나물, 여름의 연잎밥, 가을의 전어와 대하, 겨울의 과메기와 꼬막 등 한국인은 이미 계절에 맞는 음식을 찾아서 먹고 있다. 이러한 음식은 우리를 배부르게 해 줄 뿐만이 아닌 계절을 느끼게 해주며, 세월이라는 물리적, 시간적 공간의 움직임을 알려주기도 한다. 아쉬운 것은 이렇게 계절의 음식을 찾아가는 문화는 커져가고 있는데, 술에 있어서는 여전히 이런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사시사철 늘 같은 술만 마시는 것이 현재 한국의 술 문화다. 하지만 잘 찾아보면 다양한 지역의 술이 계절을 품고 있다. 봄의 냉이술과 진달래술, 면천 두견주, 날이 따뜻해질 무렵 빚어 마신 청명주, 여름에 활짝 핀 연잎을 이용한 연엽주와 백련 막걸리, 그리고 늦여름에 수확하는 오미자로 만든 오미자 와인, 가을에 수확하는 햅쌀로 빚은 다양한 술, 한겨울을 품고 태어나는 삼해주 등 알고 보면 한국의 모든 전통주는 지역과 계절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주는 한국의 얼과 혼을 가지고 오랫동안 지켜져 왔으며, 그래서 앞으로도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은 다르다. 지켜왔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아닌, 지킬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다. 전통이라고 무조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에 그 가치를 이을만한지 아닌지를 고민해야 한다. 전통주는 우리가 잃어버린 지역 문화와 우리 농산물, 발효와 숙성이라는 기다림과 인내, 마지막으로 한국의 사계를 품고 있다. 이러한 문화의 결정체인 것이 전통주의 가치다. 이 모든 것이 즐기지 않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문화, 이것이 우리가 전통주를 지켜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
일본 릿쿄(立教) 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10년 전 막걸리 400종류를 마셔보고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서 포털사이트에 제공하면서 본격적인 주류칼럼니스트로 활동한다. 가수 겸 배우 김창완 씨와 SBS 라디오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에서 전통주 코너를 2년 이상 진행했으며, 본격 술 팟캐스트 '말술 남녀'에도 고정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최근에는 O tvN의 '어쩌다 어른'에서 술의 역사 강연을 진행했다. '명욱의 동네 술 이야기' 블로그도 운영 중이며,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