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형철의 실크로드 기행] #14 웨이우얼족의 연인
카스에는 꼭 가보아야 할 곳이 많다. 중국 최대의 아이티깔 이슬람 사원, 동서양 무역물품의 전시장 똥(東)빠자, 웨이우얼족이 성인으로 모시는, '돌궐어대사전'을 편찬한 마허무더·카스가얼과 '복락지혜'라는 장편 시를 저술한 위수푸․하스․하지푸의 마자 등이 있다. 많은 역사적 유적지 중에서 청나라 때 건륭제의 후궁이었던 향비(香妃)가 잠들어 있다는 아파커훠쟈 마자를 빼놓을 수 없다. 아파커훠쟈 마자는 카스 시내에서 동쪽으로 5㎞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실제 카스에서는 아파커훠쟈 마자라는 정식 명칭보다 ‘향비묘’로 더 잘 알려져 있다.(카스에서는 간단히 ‘훠쟈묘’라고 하기도 한다. 웨이우얼어 발음을 한자로 음역할 때 주로 ‘和卓’으로 표기하지만 카스에서는 ‘霍加’로 표기한다.)
향비(香妃)의 원래 이름은 마이무란·아이즈무이다. 그녀의 가족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시기에 이 지역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북경으로 초대되었다. 이 때 황제의 후궁이 되어 총애를 받는다. 그녀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신비하게도 몸에서 향기로운 냄새[실제로는 향기로운 사막대추(沙棗) 꽃을 몸에 지니고 있었음]가 나기 때문에 향비(香妃)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뻬이징에서 관직을 하던 향비의 친척들이 모두 병사하고 마침내 향비(香妃)마저 죽자 황제는 시체를 카스로 옮겨 현재의 이곳에 무덤을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아파커훠쟈 마자’는 웨이우얼어로 ‘존엄한 자의 묘지’라는 뜻이다. 전형적인 이슬람 궁전 형식의 모양의 건축되었고, 5대에 걸친 훠쟈 가족 72명이 잠들어 있는 묘지이다.(하지만 실제는 무덤이 58개이다.) 제1대인 이슬람교 선교사 아지․마허마이티․위쑤푸훠쟈가 죽자 장자인 아파커훠쟈가 지위를 계승하여 이슬람교 백산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1678년에는 당시 이 지역의 이예얼창(葉爾羌) 왕조의 권력을 장악하기도 하는 등 선친보다 더 명성이 높았다. 1640년 그는 선친의 무덤을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마자의 원형이 되었다. 1695년 그가 죽어 이 묘지에 묻히자 묘지의 이름을 그의 이름을 딴 ‘아파커훠쟈묘’라고 하였다. 1956년, 1972년, 1982년 세 번에 걸쳐 대대적으로 수리하였고 1988년 국가 보호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공원처럼 조성된 마자의 중앙에 있는 장방형의 웅장한 건축물이 훠쟈 가족 묘지이다. 마자는 총 면적 50,100㎡의 넓은 대지 위에 높이 26m, 길이 39m, 지붕은 직경이 17m인 둥근 형태의 이슬람식 구조이고, 실내는 기둥이 없는 돔식 건축물이다. 외부 벽면은 각종 도안과 무늬가 그려져 있는 녹색 타일로 붙여 놓아 햇빛에 반사되면 마주 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다. 아치형 지붕 위에는 이슬람 사원의 상징인 조각달을 받치고 있는 뾰족 탑이 있다.
안에는 58개의 크고 작은 무덤들이 다양한 색깔의 천으로 덮여 있다. 이슬람의 전통에 따라 남자의 묘지는 여자의 것보다 크게 만든다. 따라서 향비가 살아서는 귀한 신분이었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는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묘지가 작게 만들어졌다. 입구에서 볼 때 1시 방향의 붉은 천으로 덮은 것이 향비의 묘지이다. 그리고 입구의 왼쪽에 향비의 시신을 운구할 때 사용했다고 하는 나무로 만든 가마가 놓여 있다. 아마도 향비가 정말 이곳에 잠들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현지 웨이우얼족은 51,00㎞에 이르는, 뻬이징에서부터 머나먼 카스까지 1년이 훨씬 넘는 기간에 걸쳐 향비 시신을 운구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문헌을 통해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그들의 이야기와 사실과 다르다.
청나라의 사서에는 향비의 가족을 허쭤씨(和卓氏)라고 기재하고 있다. 1758년 카스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녀의 삼촌 어써이와 오빠 투얼뚜가 반란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청조(淸朝)에서는 그 공을 인정하여 보국공(輔國公)으로 봉하고, 건륭 25년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뻬이징으로 초대하였다. 이 때 향비는 26세였는데 황제의 총애를 받아 처음엔 '귀인(貴人)'으로 후에는 '용비(容妃)'로 봉해졌다. 그녀는 황실에서도 이슬람 전통에 따라 생활하고 웨이월족의 전통 옷을 입었다. 향비는 입궁한 지 28년 되는 건륭 53년에 병사하였다. 향비는 죽은 다음 카스로 옮겨지지 않고 하북성(河北省) 준화(遵化)의 청동릉(淸東陵)에 묻혔다. 이 능을 발굴한 사람들에 의하면 향비의 관 위에 금색의 아라비아문자가 쓰여 있었으며 향비의 유골과 의복, 머리카락 등의 잔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향비가 이 곳에 묻혀 있지 않다는 역사적 고증과는 상관없이 이곳 사람들은 향비가 이곳에 묻혀 있다고 믿는다. 나도 그들과 같이 향비가 자신의 고향인 이곳에 가족들과 함께 편히 잠들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향비에 관한 이야기는 중국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인, 동북 지역이 고향인 만족(滿族) 황제와 서북 지역의 웨이우얼족 여인과의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는 사랑과 로맨스 같지만, 실제로는 청나라에 충성을 하겠다는 웨이우얼족의 일종의 맹세이자 청나라가 실질적으로 서역까지 자신들의 통치권으로 흡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