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랑방] 실크로드의 아버지 장건
기원전 2세기 전후에 현재 중국의 북부 지방은 유목민족이 주름잡던 지역이었다. 이미 진(秦)나라 말부터 이 지역에는 흉노(匈奴)족이 전체 부족을 통일하고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나라는 흉노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흉노를 물리칠 비책을 강구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기원전 200년 겨울 한고조 유방(劉邦)은 흉노를 치기 위해 출병하였으나 흉노군에 의해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만다. 백등[白登, 현재의 산시성(산서성) 따통(大同)시 동북쪽 마푸산(馬鋪山)] 지역에서 흉노군에 의해 포위된 한의 유방은 흉노 왕의 부인 이옌(閼)씨에게 뇌물을 주고 간신히 생환하였다. 이후 한나라는 감히 흉노와 싸울 생각을 못하고 화친 정책을 유지한다. 한나라 황실의 모충(冒充) 공주가 흉노 왕에게 시집을 가기도 하였고, 매년 흉노의 왕에게 막대한 양의 비단, 양식, 술을 진상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였다.
흉노는 기원전 177년 전후에 서쪽으로는 월씨(月氏)를 격파하고 천산 이북의 행국[行國, 유목민족의 국가]과 천산 이남의 성국[城國, 농업 민족의 국가] 등 서역 전체를 세력권 안에 흡수하였다. 중국에서는 한무제(漢武帝)가 즉위한 후 그 동안의 굴욕적인 흉노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무력으로 대항하기 위한 비책을 강구하였다. 이 때 한무제는 흉노 진영에서 탈영한 흉노인에게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흉노의 서쪽 지역[현재의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 주위]에 월씨(月氏)라는 부족이 살고 있었는데 흉노의 침입으로 왕이 피살되었다. 피살된 월씨 왕의 머리뼈는 흉노 왕의 술잔으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174년 월씨는 대월씨와 소월씨로 분열되었다. 대월씨는 서쪽으로 이주하여 현재 신강성(新疆省) 이리(伊犁) 강 유역에 살던 싸이런(塞人)을 몰아내고 그곳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고, 소월씨는 남쪽의 치리옌산(祁連山)으로 들어가 현지의 챵런(羌人)과 혼합되었다. 대월씨는 비록 패하여 쫓겨 갔지만 흉노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보복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한무제는 대월씨와 연합하여 흉노를 좌우에서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전략으로 성공 확률이 거의 없는 것이었다. 한무제는 대월씨로 파견할 사절단의 대표를 선발하고자 공개적으로 인재를 구했다. 사절단을 이끌 사람은 용기와 지혜, 건강, 사명감 등을 두루 갖춘 인물이어야 했다. 그 계획의 실행에 적임자로 등장한 역사적 인물이 바로 장건(張騫)이다.
장건은 사절단으로 두 번이나 서역에 다녀온다. 첫 번째는 기원전 138년 100여 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서역을 향해 출발하였다. 사절단에는 감부(甘父)라는 서역(西域)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활쏘기에 능하여 항시 장건을 옆에서 보호하는 자였다. 당시 하서주랑(河西走廊)에 살고 있던 챵런은 흉노의 통제 하에 있었다. 비밀리에 서역으로 출발한 장건 일행은 얼마 되지 않아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 장건은 10년 이상 흉노의 포로가 되어 흉노족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고 살면서 흉노족의 정치, 경제, 풍속 등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외부의 두 가지 대사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다. 그 중 하나는 기원전 127년 한의 장군 위청(衛靑)이 처음으로 흉노군을 격퇴한 것과 다른 하나는 흉노가 오손[烏孫, 현재 감숙성 하서 지역에 살던 고대 유목민족]에게 대월씨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오손에게 근거지를 빼앗긴 대월씨는 다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는 것이다.
탈출의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던 장건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장건은 자신의 심복인 감부만을 데리고 흉노진영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현재의 카스와 파미르 고원을 넘어 천신만고 끝에 대월씨에 이르렀다. 그러나 비옥한 땅에서 부족한 것이 없는 생활을 영위하던 대월씨는 흉노에 대한 과거의 원한을 잊은 상태였기 때문에 장건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장건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귀향길에 올랐다. 그는 흉노에게 다시 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갈 때 지났던 실크로드의 북로를 버리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현재의 사처(莎車)를 지나 허티옌(和田)을 경유하는 실크로드의 남로를 택하였다. 그러나 티옌산(天山) 지역을 통과할 때 다시 흉노의 포로가 되어 1년 넘게 생활하였다. 장건은 흉노족의 왕이 죽고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마침내 기원전 126년 13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장건은 비록 한무제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서역 각지에 대한 정보와 흉노족의 전쟁방식에 대해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용되었다. 기원전 123년 위청이 이끄는 흉노와의 전쟁에 종군하여 공을 세운 후 박망후(博望侯)라는 작위를 받았다. 이로서 흉노를 몰아낸 한나라는 영토가 북쪽으로 100리가 넘게 확장되었다.
장건은 기원전 119년 또다시 300여 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서역의 오손과 협력하여 흉노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이 때는 이미 하서 지역이 한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 없이 돈황, 누란을 거쳐 타리무 강을 따라 서쪽으로 간 후 현재의 쿠처(庫車) 동쪽에서 천산을 넘어 오손이 거주하는 이리지역에 당도하였다. 장건이 오손에 도착했을 때 오손은 내분이 발생하여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상당한 수확이 있었다. 장건은 오손 지역에 머물면서 주위의 여러 국가에 사신을 파견하여 한나라의 존재를 알리는 동시에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것은 흉노의 고립과 한의 번영을 상징하는 외교적 수확이다. 장건은 기원전 115년 장안에 돌아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