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을 통해 보는 역사] ① 동인 VS. 서인 파벌 싸움과 '정여립의 난'
KBS 사극 '징비록'이 동인과 서인의 파벌싸움의 정점에 있었던 '기축옥사'와 임진왜란 직전에 왜(일본)로 파견한 조선통신사 문제로 서서히 극의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과 왜의 외교적 상황이 어떠했는지, 조선 조정 내부의 정치적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극 '징비록'은 당파 싸움에 집중하느라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했던 조선의 슬픈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
동인 VS. 서인
조선 초기 훈구파(세조 때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형성)와 사림파(조선 중기 재야 사류(士類)를 배경으로 한 정치 세력)로 정치적 대결 구도를 그리던 중,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사림파가 훈구파를 몰아내고 정계의 중심에 서게 된다. 사림파는 다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이조전랑 자리 다툼이 있었다. 이조전랑은 직급은 낮았지만 인사권을 쥐고 있었기에 영향력이 세고 권한이 강했다. 이 자리를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이 대립하게 되는데, 이 때 김효원의 집은 도성의 동쪽에, 심의겸의 집은 도성 안 서쪽에 자리한데서 동인과 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인과 서인은 학문,사상적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게 되는데, 영남학파로 불리는 퇴계 이황과 조식의 학통이 동인, 기호학파로 구분되는 율곡 이이와 성혼의 학통이 서인으로 분류되었다. 이황과 조식의 학통이 분명했던 동인에 비해 서인은 학통 기반이 약했으나, 후에 정치적 중립에 있었던 이이가 동인의 반대쪽에 서면서 성혼과 함께 서인의 중심에 서게 된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정여립은 원래 율곡 이이, 성혼과 가까이 교류하여 서인에 가까웠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동인으로 돌아서서 이이와 성혼을 비판하면서 서인들로부터 여러 차례 탄핵을 받는 등 서인의 반감을 샀다. 이에 낙향한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군사적 능력을 갖춘 '대동계'를 조직하는데 이것이 훗날 '정여립의 난'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정여립의 난에 대해서는 실제로 역모를 꾸몄는지와 서인의 모함이었는지를 두고 역사적 의견이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정언신, 정언지 등 상당수 동인들이 축출되거나 희생(기축옥사)되었고,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동인과 서인의 대립은 왜구의 침략을 대비해야 했을 중요한 시기에 신하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함으로 인해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