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백성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순신 장군
성웅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그린 영화 '명량'이 연일 흥행기록을 갈아치우며 천만관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남북한을 막론하고 우리 민족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 그가 보여준 나라를 위한 희생이 다시금 부각되면서 이순신 장군의 전공(戰功)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특히, '명량'을 연출한 김한민 감독이 "흥행에 성공하면 한산대첩이나 노량대첩을 영화화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고 밝히면서 그가 승전한 다른 전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23전 23승'의 절대 승리를 보여준 이순신 장군이 펼친 주요 해전은 어떤 것이 있었고, 감독은 그 많은 승리의 전투 중 왜 명량해전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했을까?
◇ 옥포해전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
1592년 5월 7일. 판옥선, 협선, 포작선 등 총 91척의 배를 이끌고 거제도 앞바다를 항해하던 이순신의 함대는 옥포만에 이르렀다. 당시 옥포만에는 백성들을 노략질 하고 있던 왜적들의 함대 30여척이 정박해 있었다. 빠른 속력으로 옥포만에 진입한 이순신의 함대는 왜선들이 포구를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포위한 채 대포를 발사하고 화살을 퍼부어 우왕좌왕하는 왜군들을 무찔렀다. 왜군 30여척 중 26척이 불에 타거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이는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의 함대가 거둔 첫 승리였다. 승리의 여세를 몰아 합포 앞바다에서는 5척을 격침하고(합포해전,1592년 5월 7일), 이튿날에는 적진포 앞바다에서 13척을 격침(적진포해전, 5월 8일)하는 등 이순신 함대의 승리는 이어졌다.
◇ 사천해전
처음으로 거북선을 출전시켜 승리한 전투
옥천, 합포, 적진포 등에서 승리를 거둔 조선 수군은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 때, 사천 땅에 왜선이 쳐들어와 또 다시 여러 고을들을 노략질하고 있다는 소식이 이순신에게 전해진다. 1592년 5월 29일, 전선과 무기를 정비하고, 거북선을 첫 실전 배치한 이순신의 함대 23척은 여수에서 출발해 노량에서 원균의 진선 3척과 합류해 사천에 도착했다. 사천해안에서 12척의 왜선을 발견한 이순신은 좁은 해안에서는 전투가 쉽지 않다고 판단해 후퇴하는 척 왜선들을 바다로 유인했고, 거북선을 중심으로 갑자기 전선을 돌려 공격해 왜선 12척을 전부 격침했다. 사천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도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는 등 아군의 피해도 많았지만 이 날의 승리 여세를 몰아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 한산대첩
학익진 펼쳐 왜선 59척을 격파, 왜군의 호남 진출 봉쇄한 대승리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3개월, 육지에서 파죽지세로 승리를 이어가던 왜군에 일대 반격을 가한 한산대첩은 학익진을 펼쳐 승리한 해전으로 유명하다. 육지와는 달리 바다에서는 계속해서 이순신에게 패하자, 왜적은 조선 수군을 먼저 격파하기로 결정한다. 1592년 7월 8일. 왜군 73척이 견내랑에 정박해있는 것을 확인한 이순신은 견내랑은 지형이 좁아 판옥선과 같은 큰 배들이 움직이기 쉽지 않다고 판단하여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기로 한다. 주력 함대는 한산도 앞바다에 이동시키고 전선 몇 척만 왜군에 공격을 가한 것이다. 이내 조선 수군이 퇴각하자 왜군은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해왔고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순신의 함대는 학익진을 펼쳐 왜군을 집중 포화해 73척 중 59척을 격침하고 대승리를 거두었다. 여세를 몰아 7월 10일 안골포에서도 42척 중 20여척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둔다.
◇ 명량대첩
이순신,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불과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몰아낸 기적같은 승리
영화 '명량'의 실제 전투인 명량대첩은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몰아낸 기적같은 승리였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선조의 명령을 묵살한 이유 등으로 조정으로 압송당해 모진 고문과 고초를 겪는다. 하지만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이순신 대신 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철천량 해전에서 전멸하다시피하자 선조는 다급하게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 장군을 다시 보낸다.
당시 수군의 상황으로는 전투를 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선조가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유서를 이순신에게 보내지만, 그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로 시작되는 장계를 임금에게 올리고, 병사들에게는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다"고 독려하며 결사항전을 명한다. 1596년 9월 16일. 133척의 왜군이 명량해협으로 다가오자 이순신의 함대는 좁은 지형과 빠른 물살을 이용해 왜군을 공격했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우는 우리 수군에 밀려 왜군은 퇴각하게 된다. 명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협 울돌목 일대의 조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해 열세의 상황에서도 적을 무찌른 세계 해전 역사상 길이 남을 해전으로 평가받는다.
◇ 노량대첩
왜군의 총탄에 맞아 이순신 장군 전사
1598년 7월 1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왜군은 철수 작전을 시작했다. 조선은 정유재란 당시 명과 연합작전을 펼치고 있었고 왜군 고니시는 명나라 장군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며 퇴로를 열어줄 것을 부탁한다. 진린은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이순신은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왜군을 격멸하기 위해 노량해협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인다. 격렬한 전투 끝에 왜적선 500여척 중에 450여척을 격침하여 대승리를 거두지만 이순신 장군은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모든 왜군은 철수하고 임진왜란에 이은 정유재란도 종결됐다.
◇ 백성을 위해 포기할 수 없었던 이순신 장군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忠)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많은 해전 중에 명량해전을 선택한 것에 대해 김한민 감독은 "명량해전이야말로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보여주는데 가장 적합한 전투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병법에 능했던 이순신 장군은 '우세한 전략을 가지고 방심하는 소수의 적을 기습'하는 전투 스타일로 백전백승을 거두었었고, 그의 원래 스타일대로라면 명량해전은 포기해야하는 전투였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승리가 불가능할 것 같은 전투를 그가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나라의 백성이었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은 명량해전이 있기 전날밤 전장에 나가는 것을 말리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영화의 흥행에 대한 해답이 이 대사 한마디에 있는 것이 아닐까? 400여년전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며 백성의 마음을 보듬었던 위대한 장군이 다시 나타나 이 나라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