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쑤저우(蘇州)의 WSA 공장 생산 라인에 한국어가 적힌 작업 지시서가 프린터에서 출력됐다. 주문자의 이름과 귀 모양 스캔 데이터, 보청기 사양 정보가 함께 담긴 문서다. 한국의 한 보청기 센터에서 입력된 정보가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잠시 후 3D 프린터가 손톱만 한 셸(shell·보청기 외형 틀)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WSA의 아시아 매뉴팩처링 센터(AMC)는 귀걸이형(BTE), 귓속형(ITE), 이어몰드, 인스턴트핏 등 전 제품군을 생산하지만, 특히 귓속형 보청기에 집중하고 있다. 타오 용(Tao Yong) WSA 아시아 제조센터 총괄 책임자에 따르면 AMC는 WSA 그룹 내 귓속형 커스텀 모델링의 60% 이상을 담당하고, 아시아·태평양(호주·뉴질랜드 포함) 지역 생산량의 절반가량을 책임진다. 그는 “이곳은 단순한 아시아 생산 거점이 아니라 글로벌 핵심 생산 거점”이라고 말했다.
이곳이 귓속형 생산에 집중하는 배경에는 아시아 시장의 수요 구조가 있다. 한국·일본·중국 등 주요 시장에서 귓속형 보청기 선호도가 높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인식이 이러한 선호를 형성해 왔다. 다만 이는 관행적으로 이어진 선호에 가까울 뿐, 실제 적합성은 청력 상태와 사용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논밭에서 글로벌 핵심 거점으로
쑤저우 AMC는 중국이 대외 개방을 시작한 1990년대에 설립됐다. 중국과 싱가포르 정부가 조성한 산업단지에 지멘스 보청기 사업부가 외자기업으로 입주하며 출범했다. 인건비 경쟁력을 바탕으로 한 생산 거점으로 출발했지만, 이후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
2015년 귓속형 보청기 생산센터를 개설하며 글로벌 공급망에 본격 편입됐고, 2016년에는 커스텀 제품 모델링 센터가 문을 열었다. 2019년 와이덱스와 지반토스의 합병으로 WSA가 출범하면서 시그니아·와이덱스·렉스톤 등 전 브랜드 생산을 통합 담당하게 됐다.
한국이 이곳에 생산을 맡기기 시작한 것은 2016년이다. 초기에는 전체 물량의 10~20% 수준이었다. 쑤저우 AMC로의 생산 이전 프로젝트를 이끈 조유리 WSA코리아 대표는 “처음에는 국내 고객들 사이에서 중국산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했다”고 회고했다. 현재는 한국에서 판매되는 WSA 귓속형 보청기의 상당량을 이곳에서 생산하며, 핵심 부품인 페이스 플레이트(face plate)는 폴란드와 멕시코 공장 물량까지 포함해 전량 이곳에서 공급한다.
공방과 공장, 다른 방식으로 같은 제품을
귓속형 보청기는 착용자의 귀 모양에 정밀하게 맞아야 한다. 귀에 제대로 맞지 않으면 울림이나 잡음이 발생할 수 있다. 이 작업은 서울과 쑤저우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수행된다.
서울 가산의 WSA코리아 오퍼레이션센터에서는 숙련 엔지니어 한 명이 전 공정을 맡아 제작한다. 조유리 대표는 이를 두고 “가산 오퍼레이션센터는 공방이나 아틀리에 같은 컨셉”이라고 설명했다.
쑤저우 AMC는 공정을 세분화했다. 한 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하려면 높은 숙련도가 필요한데, 이런 인력을 대규모로 확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공정을 나눠 여러 작업자가 단계별로 작업을 분담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곳에서는 9명이 한 팀을 이뤄 귓속형 보청기를 제작한다. 제작 라인은 셸 가공과 조립, 품질 검사 등 여러 단계로 구성된다.
타오 용 총괄 책임자는 이를 “원피스 플로우(one-piece flow)에 가까운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한 공정의 사이클 타임은 약 2.2분이며, 보청기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20여 분이 소요된다. 핵심은 속도보다 생산 구조다. 분업화된 라인에서는 여러 제품이 동시에 각 공정을 거치기 때문에 같은 시간에 더 많은 물량을 처리할 수 있다.
-
한국과 중국은 귓속형 보청기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작한다. 다만 두 방식은 경쟁 관계라기보다 역할이 나뉜 구조에 가깝다. 가산은 일부 물량을 정밀 제작으로 담당하고, 쑤저우는 대량 생산을 통해 공급을 확장하는 역할을 맡는다.
장인의 감각을 데이터로 관리하다
쑤저우 AMC의 특징은 공정을 데이터로 관리한다는 점이다. 타오 용 총괄 책임자는 “AMC는 WSA 그룹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셸 모델링 조직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델러의 평균 경력은 9.2년이며, 10년 이상 근속자가 35.7%에 달한다. 신규 모델러는 훈련과 모의 주문 실습을 거쳐 인증 심사를 통과해야만 생산에 투입된다.
멀티스킬 인력 비중도 확대되고 있다. 현재 전체 인력의 64%가 여러 공정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2018년 도입된 ‘스마트린(Smart Lean)’ 프로그램이 있다. 품질 개선을 전제로 생산성 향상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타오 용 총괄 책임자는 “매일 아침 각 라인이 전날의 품질과 납기, 생산성 지표를 점검하고 즉시 개선한다”며 “작업대 위 티슈 한 장의 위치까지 바꾸며 공정 효율을 높인다”고 말했다. 공정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수정·개선되는 구조다. 회사 측에 따르면 이 공장은 WSA 그룹 내에서 스마트린 실버 등급을 받은 최초의 보청기 공장이다.
품질 역시 데이터로 관리된다. AMC는 90일 리메이크율 대시보드를 통해 국가별·제품별 재제작 현황을 분석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원인 분석과 개선을 반복한다. ISO 13485, ISO 14001, ISO 45001 인증을 보유하고 있으며, 최근 한국 인증기관의 현장 심사를 통해 KGMP 적합 판정을 받았다.
생산은 빨라졌지만, 핵심은 여전히 사람
보청기 생산에서 자동화와 AI의 역할은 아직 제한적이다. 타오 용 총괄 책임자는 “AI 도구를 일부 업무에 활용하고 있지만, 생산 공정 적용은 엄격한 승인 절차를 거친다”고 말했다. 표준형 제품 일부 공정에서는 자동화가 적용되지만, 귓속형 보청기는 구조가 복잡해 숙련 인력의 작업이 필요하다.
제조 현장에서 AI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려면 로봇과의 결합이 필요하지만, 보청기처럼 작고 섬세한 의료기기를 다루기에는 기술적 한계가 있다. WSA코리아 관계자는 피지컬 AI가 사람의 정교한 손동작을 완전히 대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AI는 주로 피팅 단계에서 활용된다. 개인 청력 데이터를 기반으로 보청기 설정을 조정하는 소프트웨어에 적용되는 방식이다. 생산 공정에서는 여전히 검증된 표준과 숙련도가 우선이라는 원칙이 유지되고 있다.
한국 수요, 중국 생산…글로벌 제조의 재편
WSA 글로벌 제조 네트워크는 각 생산 거점의 역할을 나눠 운영하고 있다. 폴란드는 유럽 공급을 담당하고, 멕시코는 북미 공급 거점 역할을 맡는다. 아시아·태평양 거점인 쑤저우 AMC는 귓속형 보청기 생산과 핵심 부품 공급을 동시에 맡고 있다.
타오 용 총괄 책임자는 “어떤 이유로도 이 공장은 하루도 멈추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국 춘절과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도 생산은 이어졌다. 생산 공정은 약 이틀 내 완료되며, 전체 납기는 물류와 통관 과정의 영향을 받는다. 완성된 제품은 이후 별도의 패킹과 출고 과정을 거친다.
과거 귓속형 보청기는 대부분 국내에서 제작됐다. 지금은 글로벌 생산 기지에서 만들어지는 비중이 크게 늘었다. 한 사람의 숙련된 기술에 의존하던 맞춤 제작 방식은 디지털 설계와 분업 시스템을 기반으로 대량 생산되는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안정적인 품질을 유지하면서도 공급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의 재편이다. 이러한 생산 구조의 변화가 소비자 경험을 포함한 보청기 시장 전반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는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 쑤저우(중국)=김정아 기자 jungy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