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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공항은 붐빈다. 사람들은 커다란 짐을 들고 이곳저곳 움직인다. 그 속에서 이들과 동떨어져 보이는 가벼운 차림의 한 사람이 있다. 류진석(임시완)은 어디로 갈지 정하지 못했다. 그는 사람이 많이 타는 비행기에 탈 생각뿐이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목적지를 정하게 된다. 나에게 감히 무례했던 사람, 그들이 타는 하와이행 비행기 티켓을 끊는다.
하와이행 비행기에는 각자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올랐다. 재혁(이병헌)은 아토피가 있어 친구들의 놀림에 상처받은 딸을 위해 하와이에 정착할 생각이다. 혜윤(우미화)은 매번 일이 바빠 휴가도 못 가는 남편 인호(송강호)가 아닌, 지인들과 놀러 갈 생각에 들떴다. 그렇게 각자의 사연을 가진 121명의 승객을 태운 비행기를 조종하는 기장(임형국)과 부기장(김남길), 그리고 승객을 관리하는 승무원 김희진(김소진), 임태은(설인아), 박시영(이열음) 등도 함께 비행한다. 들뜬 순간도 한순간이었다. 비행기는 테러 위협에 휘말린다. 사망자가 생기고, 이제 그 누구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하루 전, 인터넷에 올라온 비행기 테러 예고 동영상을 형사 인호(송강호)가 보게 된다. 동료들은 누가 장난을 쳤다고 하지만, 아내가 비행기에 오른 상황에서 지나칠 수 없다. 그리고 동영상을 올린 사람의 집에서 더이상 장난으로 치부할 수 없음을 느낀다. 그리고 곧 비행기 내 테러가 발생한 상황이 알려진다. 아내를 지켜내려는 형사 인호(송강호)를 비롯해 국토교통부 장관 숙희(전도연), 그리고 조금 다른 생각의 청와대위기관리센터 실장 박태수(박해준) 등은 발붙인 땅에서 승객들이 무사귀환할 방안을 모색한다. -
한국 영화에서 처음 만나는 항공 재난 영화다.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땅과 가장 먼, 가장 높은 곳에 고립된 사람들은 가장 땅과 발붙인 '인간군상' 그대로를 한 곳에 요약한다. 영어로 대화하는 초등학생들로 상징되는 부유한 아파트 단지에서 '서울 시장은 재개발을 허가하라'라는 현수막이 크게 내걸려 있는 것 역시 '인간 본성'을 암시한다. 긴박한 상황이 전개될수록 인간의 민낯은 더욱 처절하게 드러난다. 앞쪽에는 생존 가능성이 더 높은, 뒤쪽에는 생존 가능성이 더 낮은 사람들을 배치하며 머리칸과 꼬리칸이라는 계층이 자연스레 생긴다. 테러를 당한 비행기를 둘러싸고, 착륙하게 하는 과정에서도 인간의 이기심과 이타심은 치열하게 날을 세운다. '비상선언'은 이를 묵직하게 담는다. 화가 울컥 치미는 순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 목숨 혹은 가족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서게될 위치를 생각한 순간 고개도 끄덕여진다.
하지만 그보다도 한국 영화에서 처음 보는 강렬한 비주얼이 마음을 흔든다. 먼저 비행기에 대한 공포심이 있다면, 보는 것을 경계하길 바랄 정도로 생생하게 전해지는 추락의 공포가 있다. 비행기를 구해서 직접 360도 회전하는 기법을 통해 촬영된 장면은 극장 객석의 의자까지도 꽉 잡게 한다. 또한 긴박하게 오토바이를 쫓는 차 서고 장면 역시 바로 옆에 앉은 듯 리얼하다.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먼지까지도 객석, 내 마스크 안으로 들어올 듯 한재림 감독은 비행기 안의 소리와 공기 모두를 스크린으로 성공적으로 옮겨낸다. -
배우들의 뜨거움도 마주할 수 있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은 송강호, 전도연을 비롯해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이병헌, 김남길, 임시완 등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 특히, 임시완은 송강호, 전도연, 이병헌 등 선의 자리에 선 기라성 같은 선배들에 맞선 섬뜩한 악의 위치를 흐트러짐이 없이 지켜낸다. 꽤 오랜 시간 초점이 없는 눈빛과 흐트러짐 속에서도 선명한 미소는 보는 이들에게 섬뜩함을 전한다. 누가 임시완을 '미생'이라 했던가. 라스베이거스 총기사건을 보며, 가장 평범한 사람이 저지르는 엄청난 재난 상황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한재림 감독의 캐스팅 한 수다. 임시완의 성장을 가장 섬뜩하게 선언한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상선언'은 다른 재난 작품들과 결을 달리한다. 무릇 재난 영화라면 좀비에 맞선 인간의 사투(부산행)라거나 자연 재난에 맞선 인간의 사투(해운대) 등이 담기기 마련인데, '비상선언'에는 그 주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재난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에 선이 되기도, 악이 되기도 하고 '국가'가 선이 되기도, 악이 되기도 한다.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들만이 전개되는 건 아니지만, 길고 지난한 시간이 이어진다. 140분이라는 긴 상영시간 동안, 초반의 몰입도가 끝까지 이어지지 않는 것은 역시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화 '관상'(2013), '더 킹'(2017) 등을 연출한 한재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그는 '비상선언'에 대해 "최대한 리얼하게 찍으려고 노력했다"라고 밝혔다. 이어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실제 우리가 이 사건들을 체험하고 경험한 것 같다'라고 느끼는 영화이길 바란다. 그걸 위해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재난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과 공감을 나누고 싶었다. 이 영화가 많은 분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한다"라고 바람을 전했다.
한편, 영화 '비상선언'은 오는 8월 3일 개봉해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