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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짤이 돌기 시작했다. 호식(최영준)이 딸 영주(노윤서)의 임신 고백에 오래되어 얼굴로 방향을 올려도 계속 고개를 푹 숙이는 선풍기에게 괜한 화풀이를 한다. 선풍기를 바꿀 여유도 없이 영주를 키웠는데, 마주한 건 여고생인 딸아이의 임신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속에서 열불이 나는데, 속도 모르는 선풍기는 자꾸 고개를 숙인다. 그 미묘한 감정이 최영준을 통해 그대로 시청자에게 전해진다.
최영준은 '우리들의 블루스'에 대해 "최애(최고로 애정하는) 드라마"라고 했다. 원래는 '나의 아저씨'였는데, '우리들의 블루스'로 바뀌었다. 그는 "시청자였어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가 되었을 거예요. 이런 드라마가 없잖아요.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잖아요. 1화를 보고 '어이없네'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시간이 다 됐으니, 여기까지 할게요'라고 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런 느낌이 좋았어요. 일상적인 게. 참여하는 배우로서는 천운이었고요. 정말 천운이죠. 언제 이런 기회가 오겠어요. 행복했습니다"라고 덧붙여 말했다. -
'우리들의 블루스'는 제주도의 푸릉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생선 도매업을 하는 은희(이정은)가 그나마 부자이지만,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아간다. 그 속에는 해녀(고두심, 한지민 등)인 사람도 있고, 선장(김우빈 등)인 사람도 있다. 시장에서 순댓국을 팔며 살아가는 인권(박지환)도 있고, 트럭을 몰고 다니는 보부상(이병헌)도, 시장에서 얼음을 나르는 호식(최영준)이도 있다. 그냥 살아가는 그들에게 카메라를 비춘 그 순간이 드라마가 된다.
잠깐 카메라를 호식이에게 비추면 이렇다. 은희(이정은)와 결혼을 하려 했지만, 직전에 차였다. 가난이 이유였다. 가난에 사무쳐 한탕의 유혹에 빠졌다. 도박에 손을 댔고, 아내가 그런 호식에게서 도망갔다. 세 살이 된 딸이 텅빈 밥솥을 긁고 있는 모습을 보며, 정신이 들었다. 그렇게 딸 영주(노윤서)가 여고생이 될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 딸은 공부도 잘한다. 영주가 뭍으로 공부하러 가면, 낚시나 하고 사는 걸 즐길 생각이다. 그런데 영주가 임신을 했다. 한때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한 사건으로 원수가 된 인권(박지환)의 아들 현(배현성)이가 아이 아빠란다. 커다란 상황 앞에서 호식은 힘겹게 선택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권과 원수가 아닌 '사돈'이 된다. -
어려운 감정들을 보여줘야 했다. 최영준은 "격한 감정신을 일주일 안에 연기한 것 같아요. 내내 괴롭고, 조금 답답한 상태로 있어야 하는 게 힘들긴 하죠. 그런데 그것도 배우만이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남의 일인데, 글로 쓰인, 있지도 않은 사람의 일로 그렇게까지 괴로워하는 것도 행복해요. 저는 '배우들이 받는 돈은 다 고민 값'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고민도 제 일이니까요. 좋아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호식이 딸 영주의 임신 사실을 듣게 될 때, 마치 짠 듯 선풍기까지 고개를 푹 떨군다. 온라인상에서 짤로도 화제가 된 해당 장면에 대해 최영준은 "정확히 대본에 쓰여 있었어요"라고 비하인드 이야기를 전한다.
"정확히 어느 대사에 선풍기 고개가 떨어진다. 선풍기는 호식이의 마음도 모르고 속절없이 고개를 떨군다.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고개를 떨구는 선풍기의 마음까지 써져 있었어요. 선풍기 걸개를 풀어서 거기에 낚싯줄을 걸어서 FD가 선풍기 연기를 해줬어요. 그 친구가 연기를 정말 잘했죠. 저도 선풍기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다 계산된 장면이었습니다. 비밀로 할 것 그랬나? (웃음)" -
선풍기의 감정을 연기한 사람까지 있었지만, 그 장면이 빛난 것은 최영준이 표현해낸 디테일한 호식의 감정선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연기는 사건을 인지하고 해결하기까지 과정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행동심리학에 보면 그런 과정이 있잖아요. 부인하다가 인정하고, 포기하고, 단념하고, 그런 과정들이 다 담겨있기를 바라요. 딸의 임신을 받아들이고 호식이가 '병원 가'라고 말하기까지 과정이 엄청 중요했던 것 같아요. 그 뒤야 몰아치니까, 어떤 배우가 했어도 잘했을 것 같은데요. 그 전까지가 제 몫인 것 같아서 고민을 많이 했죠. 거기에 선풍기가 정말 많이 도움을 줬고요. 제 감정에만 집중하면 자칫 뻔한 장면이 나올 수도 있었는데 선풍기가 있어 주니 환기가 되기도 하고요."
"사실 처음 받은 '우리들의 블루스'의 호식이 캐릭터 설명에 '방호식, 몇 세, 딸 바보'라고 적혀있었어요. 이걸 보고 열심히 준비해서 가져갔는데, 노희경 작가님께서 바로 '딸 바보'를 지우자고 하셨어요. 너무 받아주지 말라고요. '우리 딸, 너무 예뻐~'라고 하지 말고, '으이그, 이뻐'하라고요. 툭 치고 해주든지 말든지 '뽀뽀 한 번 할까'라고 하는 캐릭터가 되라고요. 관계는 부녀지만, 사랑하는 여자로 바라보라고 하셨어요. 색다른 관점이었어요. 인권이(박지환)랑 현(배현성)이 에게도 수컷들의 싸움이라고 하셨어요. 더 세게 하라고요. 죽일 듯이 하라고. 그런 주문을 하셨어요." -
"제가 운동장 장면을 참 좋아하는데요.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생각으로 연기한 것 같아요. 시작은 사랑이고, 마지막도 사랑이니까요. 관계는 심어질 뿐이고, 그걸 거두면 사람과 사람만 남는 거지라고 말씀하셨어요. 사실 임신 등 여러 커다란 사건이 있어도 노희경 작가님 글은 사건을 따라가지 않으세요. 그 속에 있는 사람을 따라가죠. 엄청 커다란 사건을 벌여놓고 '이제 너희들 속 이야기하자'라고 가셔서 연기할 것도, 표현할 것도 많고요."
그런 과정에서 최영준의 편견이 깨지기도 했다. 최영준은 배우가 눈물을 흘리는 것에 대해 경계해 왔다. 눈물은 배우를 보는 관객이 흘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블루스' 속 호식이를 연기하며 눈물을 주체할 수 없던 장면이 있었고, 말투와 숨소리는 흐트러져 있었지만 "정확할 때에 울 수 있다면, 우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
그런 최영준이 추천하는 에피소드는 '은희와 미란'이다. 오랜 친구인 은희(이정은)과 미란(엄정화)는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은희는 어릴 적 가난한 자신을 도와준 미란이 고맙지만 저를 무시하는 태도가 미워 속으로 감정을 쌓아 뒀다. 미란은 그런 은희를 아낌없이 주고받는 ‘베스트 프렌드’로 여기며 의지했는데, 자신과 다른 친구의 마음을 알게 되며 배신감이 들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런 두 친구가 모든 것을 쏟아내며 한판 붙고, 화해하는 과정은 진한 울림을 전했다. 최영준은 "오, 너무 놀랐어요"라고 해당 에피소드를 추천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미안해, 괜찮아'라고 끝나는 데 아니었어요. 미란(엄정화)이가 은희(이정은)의 뺨을 때릴 때 정말 놀랐어요. '이거 맞아? 미란이가 때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미란이도 서운한 거죠. 그렇게 일기를 쓴 게 나쁜게 아니라,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야기를 안 한 것이 속상한 거죠. '난 진짜 친구로 생각한 건데, 친구로 장난친 건데, 그때 이야기하지 그랬어'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어요. 그 에피소드의 방식이 너무 좋았어요." -
그리고 최영준은 인권 역의 박지환과 "내 사랑"이라고 부르는 절친한 친구가 됐다. 1980년생으로 실제로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같이 하면 재미있겠다"라는 생각을 각각 했었다. 최영준은 인터뷰 중 박지환에 대해 거의 10분 정도를 이야기하며, 인권이라고도 이야기했고, 지환이라고도 이야기했다. '우리들의 블루스'가 실제로 '최영준과 박지환의 블루스'가 된 듯 느껴진 순간이었다.
"인권이는 좀 더 순수하게 대본을 바라봐요. 제가 27살쯤 연기를 시작했는데요. 늦게 시작해서인지 낭만을 가질 여유가 없었어요. 연기하는 것이 늘 전투였어요. 다 이기고 넘어가야 내 자리가 겨우 생길 것 같았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작업하며 연기를 시작한 친구들은 서로의 장·단점을 알고 있고, 보완해줄 부분을 찾더라고요. (박)지환이가 그래요. 저는 더 잘해야만 간신히 '잘한다'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데, 지환이는 '이 작업이 재밌는 거다, 행복한 거다'라고 해요. 연기를 너무 좋아하고, 본인을 정말 사랑하는 친구라서요. 많이 배웠어요. 지금도 어려울 때가 생기면 지환이에게 전화해요. 저에겐 정말 좋은 선배가, 친구가 생겼죠." -
'우리들의 블루스'의 마지막 엔딩은 푸릉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다른 마을을 상대로 한 마음 한 뜻으로 체육대회에 임하는 장면이었다. 그 속에서 카메라는 모두를 비췄고, 잠시 멈춰 그들이 나왔던 에피소드의 순간을 회상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카메라는 여러 사람을 비췄다. 최영준 역시 그 장면이 "길이길이 남을 수 있는 엔딩"이라고 표현했다.
"그 촬영 날 아침부터 긴장했어요. 그렇게 다 모인 건 처음이었어요. 선배님들까지 한자리에 다 모이시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점심을 먹고 (박)지환이랑 큰 우산을 펼쳐놓고 운동장에 누워서 살짝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바라보는데 '몇 개월이 지나니 우리가 여기 주인 같다'라고 느껴지더라고요. 제가 출연한 작품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데, 이렇게 주인 같이 느껴지는 작품이 또 있을까 생각되며 너무 좋더라고요. 떠나보내기 힘들었어요. 촬영 마지막까지 그랬어요."
사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는 한없이 동네 아저씨 같은 호식이었지만, 사실 최영준은 '전문직 전문 배우'로 통했다. 드라마 '빈센조' 속 조사장일 때도, 현재 방송 중인 '왜 오수재인가' 속 윤세필도 멋지게 수트를 입고 등장했다. 그때는 그 모습이 '최영준'일 것 같았고, 또 어디선가 정말 발붙이고 사는 인물 같이 느껴졌다. 캐릭터에 다가가는 최영준 만의 방법이 있을까. -
"특별히 많이 생각하는 편은 솔직히 아니에요. 분석을 많이 하는 편이라기보다, 분석에 반대하는 편에 가까워요. 그냥 마주하는 대로 연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그걸 좋아하는데요. 이제는 좀 책임감이 생기긴 해요. 여기에서 다른 짓을 하면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을까 고민도 되고요. 저라는 배우가 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 위에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일단 아주 풀어진 연기를 좋아해요. 특별히 많은 생각을 하기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읽으려고 하죠. 그 과정에서 여러 인물을 제 서랍에 넣어두고 그때그때 꺼내 쓰려는 편이죠."
인터뷰 당시에도 최영준은 '우리들의 블루스' 호식이와는 전혀 다른 마른 체구의 모습이었다. 캐릭터를 위해 약 9kg 정도나 체중을 감량한 상태라고 했다. 놀라운 일이었지만 정작 그는 "살찌고 빠지고 하는 게 사실 접근하기 제일 쉬워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그런 최영준은 올해 "너무 떠 있지 않기 위한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너무 떠 있지 않으려고요. 진행 중인 일정도 열심히 잘 마무리 해야 하니까요. 현장에서도 '우리들의 블루스'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곤 하는데, 휘둘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요. 평생 할 직업인데, 한두 작품이 잘 됐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니까요. 내년에도 작품 준비 잘하고 있으니, 관심 가져 주시면 좋겠습니다."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