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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염씨 삼남매를 중심으로 삶이라는 여정을 찬란하게 비쳤다. 그 속에서도 첫째 딸 염기정(이엘)은 "올겨울까지 아무나 사랑할 거다"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던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조태훈(이기우)이 나타났다. 염기정은 소개팅에서 싱글대디를 만나고 그렇게 투덜댔었는데, 싱글대디인 조태훈의 중심과 태도는 그의 눈에 정확히 들어왔다. '아무나'가 아닌 '조태훈'을 사랑하게 됐고, 두 사람은 함께 걸어간다.
이기우는 조태훈을 자기 옷처럼 입었다. 사춘기인 딸 앞에서 안절부절하고, 딸을 함께 키우는 두 누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그런데도 조태훈은 분명 가족을 사랑한다. 딸이 어렸을 때는 빨리 보고 싶어서 집에 걸어간 적이 없을 정도였다. 해방클럽에서 그는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신 후 '약한 남자'의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 느낌에서 '해방'되고 싶다고 말이다. 이기우는 커다란 키에 휑한 눈동자로 그런 조태훈을 담아낸다. 자신 역시 초등학교 때부터 쭉 가족을 보물 1호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기우는 조태훈과 비슷한 점도, 참 많이 다른 점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닮은 점이라면 마음의 온도가 '계란빵'과 비슷하다는 건 아닐까. -
Q. '나의 해방일지'가 16화라는 여정을 마쳤다. 소감이 어떤가.
"빈말이 아니고 아쉬워요. 작품에 참여했던 배우 입장에서가 아니라, 지금은 너무 시청자 입장이라서요. 16부로 끝나는 게 아쉽고,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울림이 생겨가는 때에, 더 물놀이하고 싶은데 물 위로 다시 올라와야 하는게 아쉬워요. 아마 모든 배우가 비슷할 텐데요. 예전에 제 작품을 보면 제가 나올 때만 재미있었거든요. 이번에는 반대예요.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보는 맛이 너무 맛있어서 끊을 수가 없는 느낌이에요. 해방되기 싫고, 계속 거기 있고 싶은 느낌을 받은 건 처음인 것 같아요."
Q. 시청자 입장에서 '나의 해방일지'를 왜 사랑하게 되었나.
"아마 '구씨'(손석구) 때문인 것 같아요. 구씨같은 남자 너무 멋있어요. 해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완벽남들이 판치는데, 헐렁한 티셔츠 하나 입고, 위스키도 아닌 소주병으로 이렇게 여심을 다 취하게 만드는 마력이라니요. 남자로서도 굉장히 끌리네요. 구씨 너무 멋있고요. 구씨 뿐만아니라, 창희(이민기), 기정이(이엘), 미정이(김지원) 등 '나의 해방일지'가 담고 있는 이야기들이 닿아있는 부분이 많다 보니 공감에서 우러나오는 반응이 더 깊고 진한 것 같아요." -
Q. '나의 해방일지' 태훈은 남자의 태도를 중시하는 기정의 마음을 흔들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자신과의 싱크로율은 어느 정도였나.
"표현하는 데 있어서 조심성이 많고, 누군가의 자극으로부터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편이 아니라는 건 저랑 닮은 것 같아요. 저는 실수도 그 사람의 일부라고 생각해서요. 그것까지 종합해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생각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편이에요. 하지만 저는 태훈보다 표현이 훨씬 풍성하고 밝은 편이죠. 그런 면에서는 정말 다르거든요. MBTI를 요즘 많이 하시잖아요. 저는 거기에서 E 성향(외향적)인데요. '나의 해방일지' 현장에 I 성향(내향적)이 많아요. 감독님도 그렇고요. 저는 태훈이가 이해가 안 가는데 I 성향인 친구들은 너무 공감하는 거예요. 그래서 I 성향을 탑재하려고 노력했어요. 처음에는 제가 가진 E 성향이 묻어있는 태훈이가 은연중에 나와서 감독님께 '지금은 이기우야. 조태훈 나오라고 해'라는 말도 들었는데요.(웃음) 3~4부 정도 부터는 '태훈이야. 좋아'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아요. 저도 자연스럽게 현장에서 말이 없어지더라고요. 전에는 사람들이랑 있을 때 마 뜨는 걸 못 참았거든요. 그런데 그 마 뜨는 것이 편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누가 나한테 말 안 걸면 좋겠고요. 이렇게 태훈이 되어가는구나 싶었어요. 그리고 그럴 때 현장에서 감독님 반응도 좋으셨던 것 같아요."
Q. E 성향이라면, 실제 MBTI는 어떤가?
"저는 ENFJ예요.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여행 갈 때 친구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준비를 빡세게 해서 가거든요. 날짜별로 그날의 착장을 지퍼백에 넣고, A4 이면지에 첫째 날, 둘째 날 이렇게 다 적어 놓아요. 여행 가서 '오늘 뭐 입지'라는 생각을 잘 안 해요. 지퍼백 꺼내서 그대로 입고, 다시 그대로 넣어두고 해요.(웃음)"
Q. 그렇다면, 더더욱 조태훈이 이해 안 되는 부분도 많았겠다.
"제 친구 중에도 싱글대디에 이혼남이 있어요. 태훈이가 딸과 가족에게도 이렇게 건조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이 있대요. 저는 남매들이 밖에서 만나서 모르는 척하는 것도, 지하철 다른 칸 타는 것도 이해가 안 돼요. 저는 저희 형하고 되게 친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집이 있대요. 작품을 보고, 해석할 때도 나의 주관이 개입되면 캐릭터의 농도를 흐리게 할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객관적으로 보려는 시각을 더 키워야겠다, 이기우의 시선에서 보려는 태도를 바꿔야겠다, 이번 작품에서 많이 깨닫고 배운 부분입니다." -
Q. 표현은 적지만, 태훈은 딸이 태어났을 때 빨리 보고 싶어서 매일 뛰어서 퇴근할 정도로 사실 딸에 대한 사랑이 큰 아빠다. 어떤 아빠라고 생각하고 다가갔나.
"스스로 싱글대디에 이혼남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있다 보니, 더더욱 사회에 등을 돌리고 딸로 향해있는 인물 같아요. 저는 미혼이고 딸도 없어서 그 감정을 100%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아빠가 다른 여자와 무언가 이뤄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굉장히 어렵고 조심스러웠을 것 같아요. 볼 때마다 괜히 안쓰럽고요. 제가 원래 현장에서 아역 배우들과 정말 친하게 지내고 장난치고 하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유림이랑은 유독 그걸 못했어요. 유림이도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는 감정을 잡아야 하는데, 어른 연기자라고 같이 놀자고 하면 안 되잖아요."
Q. 러브라인이 있던 기정 역의 이엘과의 호흡은 어땠나.
"이엘 씨는 정말 기정을 닮은 구석이 많은 분이셨어요. 현장에서 나이차이도 별로 안 나고, 키도 크세요. 그러다 보니 저도 편했어요. 무시 못 하거든요. 제가 (상대 배우와 키를 맞추기 위해) 다리를 과도하게 벌리지 않아도 되는 편함, 다리를 벌리고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안락함. (웃음) 이엘 씨 성격도 기정답다 보니 워낙 털털해서 쉽게 친해졌어요. 마치 우리가 전작에서 한두 번 호흡을 맞춰본 것처럼 현장에서 편하게 한 것 같고요. 둘 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동물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Q. 대본을 봐서 알고 있었을 텐데, 기정의 엄마 곽혜숙(이경성)이 태훈에게 밥을 사주던 날 촬영이 힘들었을 것 같다.
"저보다 이엘 씨가 많이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감독님도 그때 아마 '아, 큰일 났다. 저렇게 예쁘게 웃어버리셨다'라고 하셨어요. 현장 여기저기서 그 말이 들렸어요. 제 눈에도 어머니(이경성)에게 빛이 났던 것 같아요. 너무 환하게 웃으셔서요. 그러니 이엘 씨는 더 힘드셨겠죠. 어머니 분량을 찍고 프레임 밖에 계실 때, 이엘 씨가 계속 이 말을 되뇌더라고요. '아, 나 이제 어떻게 하냐'라고요. 그리고 현장에서 틈만 나면 어머니(이경성)에게 가서 손잡고, 안고, 그러더라고요." -
Q. 어머니(이경성)가 돌아가신 후, 화장하고 창희(이민기)는 인공관절을 건네받는다. 그 장면을 SNS에 올리며 돌아가신 아버님에 대한 단상을 적어놓은 글이 인상 깊었다.
"대본을 읽으면서 '이게 뭐지?' 싶었어요. 어머니 돌아가신 부분과 장례식 장면에서요. 화장하고 인공관절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장면이 몇 년 전 저와 너무 닮아있어서, 대본을 볼 때도 그 페이지가 무거웠던 기억이 있거든요. 혼자 대본 보다 눈물이 났어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되게 많이 났고요. 그래서 아버지 보고 싶은 마음에 SNS에 글을 썼는데,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에게 DM이 많이 왔어요. 특히, 코로나 때 뵙지도 못하고 화장해서 남아있는 보형물로 작별 인사를 하신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그런 DM을 보며 '저처럼 드라마와 닿아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구나'라고 느꼈어요. 제가 '나의 해방일지'가 끝나면 항상 엄마랑 통화했거든요. '너무 재밌죠'라고 얘기해요. 그런데 14부는 당일에 전화를 못 드렸어요. 그 다음날도 못 드렸어요. 다음다음 날 연락을 드린 것 같아요. 저는 14부의 이야기가 저와 닿아있다고 느꼈지만, 1부부터 16부까지 각자 닿아있는 에피소드가 많을 것 같아요. 막차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경기도러의 애환 등이요. 그런 공감이 여러 군데 포진돼, 공감하시는 분들의 좋은 반응을 이끌어가고 있지 않나 싶어요."
Q. 태훈은 '해방클럽'에 속해 있다. 혹시 이기우에게도 '해방'되고 싶은 게 있을까.
"저도 있죠. 데뷔 20년이 되다 보니, 계속 활동반경이 강남 근처가 되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자본주의의 폐해, 물질 만능주의에 세뇌당한 것 같아요. 그런 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는 생각을 2~3년 전부터 해왔고, 최근에는 행동으로 많이 옮기고 있어요. 그래서 집도 일부러 한적한 경기도로 이사해서 독립했고요. 그곳에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면서 서울에서 누릴 수 없는 그 이상의 가치를 찾아가고 있어요. 여행지에서 만난 좋은 분들에게 최근 좋은 영향을 받아서요. 화려한 포장지로 싸여있던 연예인이라는 합리화로부터 해방되려고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
Q. 구속받고 있는 것들이 있었나보다.
"아직도 '이기우 너무 크다'라는 선입견을 가진 제작자, 감독님도 존재하실 거고요. 여배우와 견줄 때 키 차이 때문에 캐스팅을 망설이시는 신체적인 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싶기도 해요. 20년 동안 연기하면서 금수저에 가방끈이 긴, 재벌 2~3세 캐릭터를 많이 했어요. '인기는 많으나, 그가 왜 연애를 안 하는지 모르겠음'이라고 캐릭터 소개에 나와 있는 인물이요. 그런데 저는 사실 창희(이민기)나 구씨(손석구)에 가까운 타입이거든요. 더 헐렁하고, 투박하고, 느슨한 성향과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아무래도 제 실제 성향과 더 맞는 역할을 해보고 싶고요. 그게 곧 정형화된 인물로부터 해방될 작은 구멍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Q. 유기견을 위한 봉사활동을 이어가는 것도 앞서 말한 '해방'과 연결 선상에 있는 행동인가. 선한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일단 강아지를 너무 좋아하고요. 동물을 대하는 국민들의 태도가 그 나라의 수준을 이야기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나라 수준은 높은데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그 정도까지는 못 미치는 것 같아요. 사람도, 동물도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길 바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하고 있어요. 반려견을 키우며, 꼭 펫샵이나 품종견만이 좋다는 생각은 못 했습니다. 요즘에는 그 생각에 더 많이 공감하고 공유해주시는 것 같아요. 이름이 알려진 직업군에서 일하는 것이 다행이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그런 때인 것 같아요. 저로 인해 가족도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요. 선한 영향력이라고 표현해주시니까, 그럴 땐 이 일을 하고 있음에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Q. 데뷔한 후,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앞으로의 배우 이기우에게 바라는 점이 있을까.
"솔직히 실감이 안 나고요. 영화 '클래식'이 첫 작품이었는데요. 200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찍었거든요. 그때 하루하루 촬영한 것을 써내라면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첫 작품이라 강하게 기억돼 있을 수도 있는데요. 그 이후에 홍상수 감독님의 '극장전'에 대한 기억도 또렷하거든요. 20년이 20년 같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앞으로가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죠. 20년 동안 나름 군대 간 기간 빼고 쉬지 않고 잘 지나왔으니, 이제 뭔가 더 의미 있는 작품들을 해보고 싶습니다."
Q. '나의 해방일지'는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나의 해방일지'는 대중적인 반응이나 화제성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작품이지만, 사실 매번 현장에 갈 때마다 감독님과 스태프들에게 받은 그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 현장이었거든요. 감독님은 대사가 있든지 없든지, 캐릭터와 상관없이 배우에 대한 존중이 확실한 분이세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들이 몇 회차 남았는지 다 기억하고 계세요. '태훈이 이제 3번밖에 안 남았어. 반사판 하나 더 대줘'라고 세심하게 챙겨주세요. 정말 이렇게 나이 먹어가고 싶다, 너무 멋있는 사람이다 싶어요. 조태훈이라는 좋은 캐릭터를 입은 것도 감사하지만, 현장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통해 이기우를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어서도 감사한 작품이었어요. 조태훈은 별로 안 나오고 말도 없지만, 이기우 40대 인생 캐릭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새로운 인생 캐릭터를 입혀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한 작품입니다."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