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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세상이 유독 나에게만 가혹한 것 같은 때가 있다. 남들이 보기에 이가령은 그런 '혹독한 시간'을 지나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특유의 긍정적인 생각으로 5년이 넘는 시간을 버텼다. 문득 지나버린 그 시간을 되돌아봤을 때, 후회와 낙담보다는 "화가 났다"고 했다. 제대로 된 출발점에 서보지도 못했다는 사실에, 나를 증명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연기에 대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시기에 찾아온 작품이 임성한(피비) 작가의 신작 '결혼작사 이혼작곡'이었다. 과거 '압구정 백야'에서 자신을 알아봐준 임 작가가 또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가령'이라는 진주가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
'결혼작사 이혼작곡'(이하 '결사곡') 시리즈를 무사히 마친 이가령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작품 속 '부혜령'이 튀어나온 듯 여전히 화려하고 빛나는 모습이었다.
연기 인생 처음으로 시리즈 드라마를 소화한 이가령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부혜령'으로 살았고, 또 전 시즌을 이끄는 주요 캐릭터로 작품의 중심을 잡아왔다. 게다가 이가령은 '결사곡'으로 드디어 대표작을 얻었다. 그런 작품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남다를 것 같았다.
"후련한 것보다는 좀 아쉬워요. 시즌3이 끝나서 진짜 다 끝난 느낌이에요. 시즌 1, 2할 때는 3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는데, 시즌3가 확실하게 끝맺은 느낌이 아니라 4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상은 종료가 된 상태에요. 마지막 시즌 중반부부터 배우들과 다음 시즌이 있을지 얘기를 했어요. 드라마를 너무 오래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익숙해져서 현장에서 또 만났으면 좋겠다고요." -
특히 '결사곡' 시즌3에서는 악연인 '송원'(이민영)의 영혼에 씌는 빙의 연기를 펼쳤다. 임신에 유산, 게다가 모성애 연기까지 소화했다. 마치 1인 2역 같은 연기에 도전한 그는 모든 것이 "재밌었다"고 했다. 그동안 배우로서 너무 해본 것이 없었다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역할이 어렵기도 하지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영광인 것 같아요. 그런 기회가 별로 없잖아요. 어렵기는 한데 시즌 1, 2, 3 하면서 같은 역할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바뀐 캐릭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재밌었던 것 같아요. 1, 2에서는 혜령이가 항상 화가 나 있고 그런 캐릭터였는데 시즌3에서는 빙의 돼서 재밌었어요."
"모성애 연기도 보여드리게 됐는데요. 현장에 가면 아기가 너무 예뻤어요. 자연스럽게 사랑스러운 눈빛이 나올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거든요. 촬영하는 날마다 보니까 그날그날 올 때마다 아이가 금세 커 있는 거예요. 정말 엄마가 된 느낌이었어요." -
이번 시즌에서는 배우 교체를 겪기도 했다. 기존에 출연했던 성훈, 이태곤, 김보연이 하차하고 강신효, 지영산, 이혜숙이 그 자리를 채웠다. 상대 배우가 바뀐 상황이었던 것. 현장 분위기는 어땠을까.
"배우가 바뀌어서 혼란을 준 부분은 거의 없었고요. 아쉬운 부분이 아예 없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기존 배우분들이 새로운 배우분들을 맞이하는 기분이었어요. 누군가 했던 역할을 새로운 배우가 해야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와준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도 있었고요. 모두 잘 적응을 해주신 덕에 현장에서도 호흡을 맞추는 데 어려움은 없었어요."
"강신효 배우와의 연기는 재밌었어요. 연기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스토리나 일상적인 연기 이야기를 하면서 더 친해졌거든요. 덕분에 현장에서도 편하게 했던 것 같아요." -
'인과응보'가 작품의 메시지라지만, 부혜령은 유독 잘 안 풀리는 캐릭터이기도 했다. 특히 시즌3에서는 라디오국의 세 여자 중 유일하게 달달한 모멘트가 없었다. 이가령은 피영, 시은 역의 박주미, 전수경의 꽁냥꽁냥 로맨스 연기를 보며 실제로도 질투가 났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극 중인데도 두 사람만 연애하고 행복하니까 배가 좀 아프더라고요.(웃음) 배우 이가령의 느낌이 아니라 부혜령의 느낌으로 진짜 언니들이 미운 거예요. '내가 꼬셔야 하는데' 하면서요.(웃음) 둘이 커플이 돼서 앉아 있는데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약간 질투도 나고 했어요." -
긴 호흡의 작품에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선보인 이가령은 하면 할수록 욕심이 났다고 했다. 시즌3에 접어드니 자신만의 해석을 담아 캐릭터를 소화하고 싶어졌다. 여유가 생긴 거다. 하지만 엄격한 대본으로 정평 난 피비 작가의 뜻과는 맞지 않았다. 전개가 되면 될수록 피비 작가의 큰 그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가령에겐 또 하나의 배움이었다.
"시즌 1, 2 때는 제가 연기하면서도 여유가 없다 보니까 몰랐는데, 시즌3가 되면서 표현적으로 조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자꾸 제 생각을 연기에 넣게 됐어요. 작가님께서 그걸 보시고 말씀해 주시는 부분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왜 그러시지'하는 생각을 할 때도 아주 살짝 있기도 했고요. 하지만 제 생각을 넣는 순간 작가님이 생각하는 글과 너무 다른 내용으로 흘러갈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지문대로 해라. 대본에 충실하라'라고 하시는 마음을 이해했어요." -
이가령은 '결사곡' 덕분에 새 보금자리도 찾았다. 규모 있는 소속사에서 케어를 받으며 연기 활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다. 이 과정에서 모델 활동 당시 사용했던 정보를 바로잡을 기회가 생겼다.
"제가 연기를 못하게 되는 시기가 있었고, 그래서 얼마 전까지 소속사 없이 혼자 활동을 했어요. 프로필 상 정보가 올라가 있는 것에 대해 수정할 기회가 없었고, 이거에 대해서 인터뷰할 기회도 없었거든요. '결사곡'하는 동안에는 작품에만 매진하고 있어서 다른 걸 돌아볼 겨를이 없었는데, 회사를 찾으면서 (정보를) 고치게 됐어요."
"모델들은 활동하면서 역할에 따라 나이를 좀 늘렸다 줄였다 하기도 하거든요. 인터넷상에서 정보 공유를 같이 하다 보니까, 팬분들이 생기면서 퍼 나른 정보가 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제 나이가 88년 생으로 공식화가 되어 있더라고요. 제 원래 나이는 80년 원숭이띠고요. 인터넷상에 나온 나이와는 달라요." -
7년의 세월을 말 그대로 '버텨낸' 이가령이다. 그에게 '결사곡'은 연기 인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꼬리표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대표작이 생긴 건 배우로서 잊지 못할 순간일 터다.
"저에게 '결사곡'은 꼬리표가 된 작품은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세 작품을 한 거라서 이렇게 연달아 기회가 오는 게 쉽지 않은데 너무 기뻤거든요. 2년에 걸쳐 촬영을 했고 여러 가지로 배우 생활이 끝날 때까지 기억에 남을 것 같고, 혜령이라는 캐릭터도 모두의 기억에 남으면 좋겠어요. 이가령이라는 배우의 이름보다 혜령이를 기억하고 계신 분들이 많은데, 그렇게 저에게 혜령이가 계속 남아 있어도 싫지 않을 것 같아요."
- 이우정 기자 lwjjane864@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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