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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는 가까이 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준익 감독이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강하늘)를 선명히 보기 위해, 송몽규(박정민)를 곁에 두었듯,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유아인)를 선명히 보기 위해, 영조(송강호)를 곁에 두었듯, 영화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설경구)와 정약용(류승룡) 형제를 나란히 두었다. "지렛대의 원리"라는 이준익 감독의 눈이다.
이준익 감독이 '동주'에 이어 한 편의 흑백영화 '자산어보'를 선보였다. '자산어보'의 시대는 조선이다. 두 작품 사이에는 묘한 연결지점이 있다. 윤동주는 시대의 아픔을 시로 노래했고, 정약용은 "시대의 아파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동주'에서는 아픔의 시대가 흑으로 담겼고, '자산어보'에서는 시대를 달리 생각한 인물을 백으로 담아낸다. 같은 흑백영화지만 결이 다르다.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의 처음부터 흑백영화로 생각했다. 그는 "피사체를 흑백을 전재로 구성하느냐, 칼라를 전재로 구성하느냐부터 다르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산만해질 수 가 있다. 하지만 '자산어보'는 처음부터 흑백에 맞는 배치를 했다"고 전했다. -
그 화면안에서 왜 정약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그 출발은 "조선의 근대성에 대한 관심"이었다.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등 조선 근대의 시작에 관한 다양한 주장이 있다. 이준익 감독은 "국가의 근대성을 명확하게 구분짓기 어려우니 개인의 근대성에서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그 출발은 동학이었다. 동학을 보다보니 서학이 보였다. 그리고 신유박해에 초점이 맞춰졌다.
"신유박해 때 100여 명이 사형을 당한다. 그 중 황사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황사영의 길을 찾아가다 제천의 베론 성지에 가게 됐다. 그곳에 신부님이 황사영에 대한 논문도 쓰셔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글도 써봤는데 '변산'이후 '내가 아직 준비가 덜 되었구나' 생각하며 덮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하다, 정약전이 떠올랐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이름만 나오는 창대에 궁금증이 생기더라."
"성리학의 기본 이념은 수직적인 세계다. 정약용은 임금과 관료가 어질게 다스리는 것을 강조하는 '목민심서'를 쓴다. 반면, 정약전은 수평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아닌 자연을 관찰한 '자산어보'를 쓴다. 동생 정약전은 '목민심서'를 쓸 때마다 형에게 초본을 보내 자문을 구하고, 형 정약전은 이를 보며 '동생이 성리학을 바로 세우려 하는구나. 수직 사회의 건강함을 지탱하기 위해 수평사회가 풍요로워야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형제간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다." -
정약전은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청년 창대를 만난다. 두 사람은 신분도 나이도 차이가 나지만 서로의 스승이 되어준다. 창대는 약전에게 해양 생물들에 대한 지식을, 약전은 창대에게 글을 가르쳐준다. 그 속에서 약전은 과거 자신이 들었던 '주자는 참 힘이 세구나'라는 말을 하게 된다. '자산어보' 속 세 장면에 컬러가 담긴 이유와 연결된 지점이다.
"입장의 전환이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하기도 한다. 서학에 몸을 담았을 때 약전은 제사를 금하라는 조선의 관슴을 무시한 칙령에 반하게 됐다. 이후 유배지에서 우물보다 더 작은 우물 안에 있는 창대를 보게 된다. 그런 창대가 깨이는 순간이다. 우물밖으로 개구리가 튀어나가는 것."
'자산어보'를 완성하기 위해 함께 한달 여의 시간을 함께 있었다. 함께 밥을 나누는 사이를 '식구'라고 하는데, 배우 설경구, 변요한, 이정은 등을 비롯해 스태프들까지 모두 한 식구가 된 현장이었다. 이준익 감독은 매 작품 마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데, '자산어보'를 마친 눈물은 더욱 진했다. -
"한 작품을 스태프, 배우들과 열심히 촬영하고 난 후에 오는 감동이 있다. 영화를 같이 작업한 '사람들' 때문에 오는 거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영화에 그 시간과 영혼이 박제되어있지 않나. 그걸로 충분하다."
'자산어보' 속에는 바다의 생물, 고기, 그리고 이것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들이 등장한다. 보기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도는 음식들, 실제로 먹어본 소감을 물었을 때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영화에 출연하는 음식도 출연진이다. 먹거리로 생각하면 안된다. 영화하는 사람들은 다 그럴 거다. 담당자가 어딘가 가져가서 처리하겠지만, 촬영한 음식을 바로 그자리에서 먹지 않는다. 그럼 안된다. 출연진에 대한 태도가 그러면 안된다." -
남다른 정성을 다해 찍은 작품이다. 이준익 감독은 "'변산'의 실패를 디뎌서 뭔가 정성된 영화를 만들려는 의지가 강했던 영화"라고 솔직히 말한다.
"실패는 보약이다. '변산'을 실패하지 않았으면, 이 영화를 찍으려고 했을까라는 의문도 든다. 나는 즉흥적인 사람이라, 경솔한 선택을 많이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잘못된 결과일 때도 있지만,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낼 때도 있다. 내 14편의 작품이 다 이상하지 않나. 한 사람이 찍었다고 보기 힘든 작품들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잠재력은 무한한데, 교육 받은 틀로 정해진 채로 보고 싶은대로 보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대로 봐야하는데, 보고싶은 대로 보니까 놓치는게 많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처럼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다보면 재능이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발현되기도 하고, 재능인줄 알고 갔더니 형편없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내 삶이 그렇다. 영화마다 고백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이준익 감독이 요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상"이다. "아무리 성공을 해도 일상이 깨진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면서다.
"인생을 격동적으로, 중구난방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가지런한게 좋다. 그래서 일상인거 같다. 인간이란게 내일의 일을 모르니, 또 언제 일상이 흐트러질지 모르니, 그것을 찾기 위해 죽는 날까지 노력해야하는 건 아닐까."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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