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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기 맞는 '위기의 승부사' 아산 정주영…업적 재조명

기사입력 2021.03.18 18:15
  •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아산나눔재단 제공
    ▲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아산나눔재단 제공
    오는 21일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별세한 지 20년이 된다. 아산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등 다양한 수식어를 가진 한국의 대표 기업가이다.

    1915년 11월25일 강원도 통천군에서 6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아산은 소 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해 인천에서 부두 하역일과 막노동을 했고, 쌀가게에 취직해 일하다 3년 만에 가게 주인으로부터 쌀가게를 넘겨받아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아산은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세워 본격적인 기업인의 길에 나섰고 1950년 두 회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을 설립했다. 1967년에는 현대차를 세웠고 1968년에는 2년5개월이라는 세계 최단기간 완공 기록을 남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착공했다.

    이후 조선에 눈을 돌렸다. 조선소가 없는 상황에서도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에게 26만t급 2척을 수주했으며 1973년 현대조선중공업, 1975년 현대미포조선 등을 세워 현재 조선업계의 토대를 닦았다.

    1976년에는 순수 국산 자동차 1호인 포니를 만들어내며 세계 자동차 업체 중 16번째로 독자 모델을 개발했고, 그해 사우디아라비아 공사를 따내며 중동 진출의 꽃을 피웠다. 1983년에는 현대전자를 설립해 첨단전자 분야로 영역을 확장했다.

    1981년에는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아 5개월 뒤 '바덴바덴의 기적'을 일구기도 했다.

    아산은 한국 경제의 살아있는 신화로 추앙받았지만 1992년 국민당을 만들어 대권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뒤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 경협 시대가 본격 개막하자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1998년 6월17일 85세 고령에 소 500마리를 끌고 군사분계선을 넘는 감격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3개월 뒤 금강호가 출항하면서 시작된 현대의 대북사업은 3년 뒤인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수익성 없는 대북 사업에 대한 '과다 출혈'로 그룹 자금난은 심화됐다. 2000년 현대그룹 경영권을 놓고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충돌한 '왕자의 난'이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로 이어지며 결국 그룹은 쪼개졌다.

    아산은 "신용은 곧 자본이다", "내가 살아 있고 건강한 한, 나한테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 "모험이 없으면 큰 발전도 없다" "매일 매일이 발전 그 자체라야 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은 정지가 아니라 후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등의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조선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반대하거나 비웃었지만 "이봐, 해봤어?"라는 한마디와 함께 도전해 결국 현대중공업이라는 세계 최대 조선업체를 일궈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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