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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진짜 몽글몽글했어요."
배우 정수정을 만든 순간들이 있다. 대중의 뇌리에는 아직 그룹 에프엑스(f(x))의 멤버 크리스탈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지 모른다. 하지만 드라마 '슬기로운 깜빵생활'부터 영화 '애비규환', 드라마 '써치'까지 배우 정수정은 자신의 자리를 단단하게 만들어왔다. 물론 그전에도 배우로서 드라마 '상속자들', '하이킥! 짧은다리의 역습'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하지만, 저 몽글몽글한 순간. 그 순간을 지나며 '배우 정수정'이 된듯하다. -
배우 정수정은 영화 '애비규환'에서 토일 역을 맡았다. 토요일과 일요일 사이에 태어난 딸의 이름을 친아빠(이해영)는 그렇게 지었다. 엄마(장혜진)의 이혼과 현아빠(최덕문)와의 재혼을 겪은 토일은 22살이란 어린 나이에 남자친구 호훈(신재휘)의 아이를 임신한다. 하지만, 당당하다. 결혼 후, 5개년 계획까지 세운 뒤 토일은 부모님에게 호훈과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한다. 물론 당황한 부모님은 흔쾌히 수락하지 못했다. 토일은 집을 나서 친아빠를 만나러 간다. 막연한 자신의 삶을 앞에 두고, 얼굴도 이름도 흐릿한 막연한 만남을 위해 떠난다.
정수정과 토일은 비슷하고 달랐다. 정수정도 토일이처럼 당차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책임감도 있고, 저지른 일은 자기가 수습하는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 부분은 최하나 감독에게 물었다. 임신 사실을 5개월이나 숨긴다거나, 이런 극단적인 모습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수정이 엄마와 많은 부분을 상의하는 딸이라서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감독님께서 '토일이는 자기가 제일 똑똑한 아이인 줄 아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하셨어요. 저랑 다른 사람이잖아요. 이해 안 가는 부분이 있는 게 당연한 것 같아요. 제가 이해를 해야죠." -
쉽게 말했지만, 촬영을 앞두고 울기도 했다. 압박감이 느껴졌다. "잘 할 수 있고, 잘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결정했지만, 촬영일이 코 앞까지 다가왔을 때 '내가 이걸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정수정의 곁을 지켜준 것은 최하나 감독이었다. 연령대도 비슷한 두 사람은 꽤 많은 부분을 닮아 있었다. 좋아하는 영화, 음식부터 삶의 방식도 닮았다.
"서로를 찾은 느낌? 그런 부분이 작업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나이 때문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내가 행복해야 하고, 나의 행복이 우선이고, 내가 행복해야 좋은 것도 따라온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나 자신을 믿고 행동해 나가고, 이런 태도들이 감독님과 비슷했던 것 같아요." -
영화 '애비규환'은 정수정의 스크린 데뷔작이다. 조심조심 한 발을 천천히 내디딜 것도 같지만, 정수정은 그렇지 않다. 일단, 첫 영화, 첫 장면부터 키스신이었다.
"멘탈이 나갔었어요. 신재휘 씨랑 몇 번 안 만난 상태에서 키스씬을 찍었거든요. 굉장히 오랜 시간 봐온 사이, 그래서 사랑하게 된 사이, 그런 연기를 해야 했는데요. 진짜 촬영을 많이 했어요. 테이크도 여러 번 갔고요. 앵글도 다양하게 찍었어요.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많이 찍다 보니까 그런 건 없어지더라고요. 영화에는 진짜 많이 편집된 거예요. 감독님께 '왜 그렇게 오래 찍었어요' 여쭤보기도 했어요. 그냥 열심히 했어요.(웃음)" -
그다음에는 쭉 임산부로 등장한다. 허리에 손을 짚고, 다른 손으로는 배를 받치고, 허리를 뒤로 한 채 걷는다. 무대 위 크리스탈의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모습을 정수정은 그럴싸하게 보여준다.
"저 정말 임산부 리스펙 하게 됐어요. 허리가 너무 아파요. 무거운 백팩 하루종일 메고 다닌 기분이에요. 자세도 다 틀어지고요. 끝나고 도수치료도 많이 받았어요. 처음에는 고민이 많았어요. 임산부인 언니들에게 물어보는데,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복대를 차니까 너무 자연스럽게 자세가 나오던데요. 무게도 있고, 차고 똑바로 눕는 것도 불편하거든요. 복대가 무겁지는 않지만, 온종일 차고 있으면 10kg 정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
토일이를, 그리고 배우 정수정을, 든든하게 지탱해 준 것은 엄마와 현아빠, 배우 장혜진과 최덕문이었다. 정수정은 "너무 소중한 가족 같아요"라고 두 사람에 대해 말한다.
"저는 첫 영화고, 경력도 아기잖아요. 그런데 선배님들께서 먼저 마음을 열어주셨어요. 제가 긴장하지 않고 편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요. 선배들이 주는 에너지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장혜진 선배님은 정말 밝으세요.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서 정말 친구같고, 언니같고, 엄마같고, 선배같고 그래요. 실제로도 언니라고도 하고, 엄마라고도 했어요. 맨날 '현장 너무 좋았지, 또 하고 싶다' 그런 말씀을 하세요."
"최덕문 선배님은 조카와 삼촌 같은 느낌이랄까요? 장난도 많으시고, 애드리브도 많으시고, 현장부터 뒷풀이 때까지 분위기 메이커셨어요. 요즘에도 '써치' 하면서 만나잖아요. '내 딸이 군인이 됐냐'이러세요.(웃음)" -
'애비규환'을 촬영하면서 몽글몽글한 순간이 있었다. 친아빠(이해영)과 헤어지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마음이 이상해서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나면 안 되는 장면이었다.
"친아빠와 촬영이 많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갖고 있던 서먹함이나 어색함이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신기하게, 헤어지는 장면을 찍을 때 아빠도 울고, 저도 울어서 NG가 났어요. 마음이 진짜 이상했어요. 몽글몽글하다고 할까요?"
이전에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드라마 '슬기로운 깜빵생활'을 찍을 때였다.
"'슬기로운 깜빵생활' 할 때, 면회 가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제 컷이 아니었는데요. 박해수 오빠가 이야기하는데 너무 슬퍼서 울었어요. 그때부터 연기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때부터 좀 더 캐릭터에 몰입하려고 고민하고, 노력하게 된 것 같아요."
"연기라는게 다른 인생을 살아보게 되는 거잖아요. 모든 배우가 그렇게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매력인 것 같아요. 제가 언제 임산부가 되어보며, 언제 여군이 되어보며, 언제 깜빵간 연인을 만나보겠어요. 이 모든 게 참 신기한 경험이고, 쉽지 않은 캐릭터들이잖아요. 나랑 다른 인물을 내가 표현해야 하는 것. 그것부터가 되게 재미있는 것 같아요." -
'애비규환' 속 토일이는 22살이다. 지금의 정수정은 27살이다. 22살, 그때에는 몰랐던 것들을 지금은 깨닫기도 한다.
"뭔가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엔 어려운 것 같아요. 주위 사람들이 얘기해주면 그때야 알게 되는 것 같아요. '호불호가 많이 강했는데, 요즘에는 좀 줄어들었네', '뾰족한게 많이 둥글어졌네' 이런 말을 듣게 됐어요. 그런가? 그런가보다. 생각해요. 제가 배워나가는 거고, 깨닫게 되는 거고. 그런 것 같아요. 이제는 제가 원했던 여유가 조금은 생긴 것 같아요."
- 조명현 기자 midol13@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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