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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혜수, 27살…비워내서 채울 수 있게 된 것들

기사입력 2020.10.25.00:01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보람 역을 맡은 배우 박혜수 /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보람 역을 맡은 배우 박혜수 /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우 박혜수가 오른쪽에 앉았다. 꾸뻑 인사를 하면서 시작됐고, "저 대답하다가 울 뻔했어요"라며 마무리됐다. 박혜수는 모든 질문에 몸이 45도쯤 앞으로 쏠려 있었다.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질문을 경청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을 이어갔다. 그 사이 박혜수의 근처에 머문 사랑스러운 공기에 대해서 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다만, 그 공기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박혜수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보람 역을 맡았다. 보람은 삼진전자 회계부 사원이다. 올림피아드 우승 출신의 수학 천재이지만, 주요 업무는 가짜 영수증을 처리해 회계 장부 숫자를 맞추는 것. 회사에서 토익 점수에 따라 진급 시켜 준다는 말에 토익반에 합류했다. 늘 곁에 있어주는 친구 자영(고아성), 유나(이솜)와 함께다. 자영이 회사의 비리를 마주했을 때, 수학적으로 그 문제를 풀어준 것도 보람이었다.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스틸컷 /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스틸컷 /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박혜수는 보람 역을 맡았을 때, 관계성에 집중했다. 보람이가 가장 편한 친구들인 자영, 유나와 있을 때, 토익반 친구들 사이에 있을 때, 또 직장 상사를 대할 때 온도가 각각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셋이 있을 때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때의 보람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로 확장해 나갔다.

    "전에는 캐릭터를 만들 때, 그 캐릭터에만 집중했어요. 그런데 연기를 하다보니, 캐릭터는 그 인물을 중심으로 시대적 배경도 있고, 설정 등을 통해 만들어지는 거였더라고요. 그 중에서 주변인물과의 관계가 얼마나 잘 표현되는가에 따라 인물의 깊이감이 드러나는 것 같았어요. 자영, 유나, 보람이는 셋이 8년째 같은 회사, 같은 처지에 있잖아요. 그래서 서로 의지하고. 그 부분이 잘 표현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박혜수는 덥수룩한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썼다. 유나와 달리 외모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인물. 보람이를 위해 긴 머리도 잘랐다. 핸드폰에 1년 전 오늘이 떠서 보니, 지난해 10월 11일이 머리를 자른 날이었다. "보람이 되는 첫 순간,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어요"라고 말하는 박혜수다.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보람은 눈치채셨을지 모르겠는데, 의상도 몇 벌 없어요. 그래서 돌려 입고 그랬거든요. 무채색이나 튀지 않는 옷을 입고요. 머리를 자르고, 안경을 끼고, 거울을 보는데 제 모습이 아닌 것 같은 거예요. 진짜 90년대에 있을 것 같은, 90년대 자료화면에서 방청객 어디에 앉아서 리액션하고 있을 것 같은 인물 같은 느낌이었어요. 제가 사실 머리가 곱슬머리가 심한데, 그걸 피지 않고 더 덥수룩하고 붕 떠 있는 느낌을 살렸어요."

    보람은 유일하게 기성세대와 대화를 나누는 인물이기도 하다. 회계부 부장 봉현철(김종수)은 보람에게 "진짜 어른"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배우 김종수는 박혜수에게 "정말 너무 좋은 어른"이시기도 했다.

    "부장님께서 쓰신 편지에 '세상은 점점 나빠지는 걸까?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그 시절을 안 살아본 사람들에게 너무 무책임하잖아'라는 글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 같아요. 그런 마음을 가진 분이셔서 보람이를 보시는 시선이 따뜻했을 거예요. 김종수 선배님도 저에게 그랬어요. 처음 뵈었을 때부터 저를 보람이로 생각해주셨어요. 촬영 끝나고도 따로 찾아뵌 적이 있었는데요. 언제든지 맛있는 거 먹고 싶으면 연락하라고 하셨어요. 그 말씀이 정말 저를 아끼고 걱정해주시는 진심이 느껴져서 너무 감사했어요. 또 뵙고 싶네요."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박혜수는 지난 2018년 영화 '스윙키즈' 이후,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으로 돌아왔다. '스윙키즈'때와 달리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현장에는 든든한 언니들이 있었다. 이솜, 고아성, 박혜수 이렇게 2살 터울이다. 언니들은 박혜수의 자신감이 되어줬다. "현장에서 언니들이 제 연기를 보고 좋다고 해주면, 그게 그렇게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라고 말하는 막내 박혜수다. 그리고 이는 사랑스러운 공기를 만든 힘이기도 하다.

    "저는 요즘 사랑꾼이 됐어요. 언니들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서, 정말 사랑이 많아졌거든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도 그렇고, 사람을 대할 때, 전보다 훨씬 더 마음이 열려있어요. 언니들에게 사랑받은 만큼 줄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아요."

    언니들을 말할 때, 가장 신이나는 막내다. 자영, 유나, 보람이 퇴근 후 맥주 한잔 기울였듯, 고아성, 이솜, 박혜수도 촬영을 마친 뒤 합숙을 자처했다.

    "(이)솜 언니가 요리해서, 간단히 술을 곁들여서 먹어요. 오늘 촬영에 대해 이야기하고, 내일 찍는 장면도 이야기하고, 진짜 가족처럼 지냈어요. 근데 사실 촬영이 끝나고 나면, 그게 이어지기가 어렵잖아요. 그런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촬영이 1월 말 쯤 끝났으니, 8개월쯤 지났는데요. 그 사이에도 끊이지 않고 연락을 주고 받았어요. 이 관계가 영화처럼 똑같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저는 너무 행복해요."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배우 박혜수,고아성,이솜 /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배우 박혜수,고아성,이솜 /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우라는 직업이 정말 매력적이라고 느껴지는 게요. 작품 한 번 할 때마다 정말 많은 에너지를 쏟고, 고민하며 인물을 만들어내잖아요. 그러고 나면 제 삶에 그게 어떤 식으로든 작용을 해요. 할 때마다 제 안에 다른 저의 모습이 생겨나는 것 같고요. 그러다 보니 계속 연기를 한다면, 제가 조금 더 풍부한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는 사람을 얻은 것이 제일 값진 일인 것 같아요. 연기적으로도 많이 배우지만, 이 길을 저보다 오래 걸은 사람으로서,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삶을 대하는 태도를 언니들을 보며 많이 배워요."

    사실 박혜수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들어가기 전까지 비어있는 시간이 있었다. 영화 '스윙키즈'(2018)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졌다. "책 읽고, 영화보는 것을 좋아해서 하는 것도 있지만, 안 하면 불안하기도 했던" 박혜수는 크게 마음을 먹고 '가만히 있는' 시간을 보냈다. 집을 청소한다거나, 커피를 내려 마신다거나, 그런 단순한 행동들로 하루를 채워 갔다. 그러면서 "나중에 후회하면 어쩌지"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반드시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그전에는 제 시야가 좁았던 것 같아요.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에 너무 사로잡혀서, 저라는 사람의 삶을 소홀히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연기라는 게, 인물을 표현하는 거지만, 그 역시도 제가 하는 일이잖아요. 제가 바로 서 있어야하는데, 제 자신이 바로 서 있지 못했던 거죠. 쉼을 통해 저 자신과의 균형을 맞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 삶이 행복해지고 나니까, 대본을 대할 때에도, 감독님을 만날 때에도, 좀 더 자신감도 얻게 되고, 에너지 있는 모습으로 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보람 역을 맡은 배우 박혜수 /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보람 역을 맡은 배우 박혜수 /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지금의 박혜수는 "10년짜리 일기장에 매일매일 써 내려가는 두 줄의 일기"를 쓸 때 가장 행복하다. 이 일기장을 돌아보게 될 날들이 기대된다. 27살이 된 지금, 배우 박혜수와 마주하게 된 자신은 조금 다른 마음가짐이다.

    "신기한 게요, 27살이 되고 나니 저를 완전 그렇게 아기 취급을 안 해주시더라고요. 어깨도 좀 더 무겁고요. 이제는 진짜 처음 시작하는 어린 신인의 마음에서 벗어나서 조금 더 발전해 있고, 성장한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막중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개봉하면 반응이 어떨까 많이 긴장돼요. 보람이 캐릭터에 좋은 반응을 마주하면, 너무 벅차고, 잘 가고 있다고 느껴요. 예전처럼 저를 막 몰아세우기보다 이제는 열심히 하되, 스스로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면서, 열심히 달려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저는 제가 되게 잘 흔들리고 무너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고)아성 언니가 '너는 되게 단단한 사람'이라고 얘기하더라고요. '왜 그렇게 봤을까' 생각해봤더니, 저는 쉽게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 같아요.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고, 일어서고, 하다 보니, 실제로 단단해지는 것 같고요. 앞으로도 제가 연기를 하고, 나이를 들면서, 그만큼 무언가를 마주하게 될 텐데, 그것도 제가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보람 역을 맡은 배우 박혜수 /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보람 역을 맡은 배우 박혜수 /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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