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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슬픈 지하실 매치… 영화 '기생충'

기사입력 2019.06.11 18:41
  •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기생충'이 개봉한지 열흘이 지났고 관객수는 700만을 훌쩍 넘겼다. 그리고 '근세'를 연기한 박명훈 배우는 영화정보 등장인물에 당당히 프로필을 올렸다. 이쯤 되면 '기생충'의 후반부 이야기를 포함한 리뷰를 써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스포일러 유출을 걱정한 나머지 기자들에게 편지까지 돌린 봉준호 감독도 지금쯤은 이해해줄 것이다.

  • 영화 '기생충' 스틸컷
    ▲ 영화 '기생충' 스틸컷

    고작 햇살 한 뼘 정도만 창가 근처에 겨우 비친 듯 만 듯한 반지하집에 사는 기우(최우식)는 그렇게나 부자라는 박사장(이선균)네 집, 널찍한 마당에 햇빛이 가득 찬 대저택으로 선뜻 들어선다. 쭈뼛거리거나 기 죽은 뭐 그런 것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기우를 시작으로 기정(박소담), 기택(송강호), 그리고 충숙(장혜진)까지 차례로 이 대저택에 침투해 들어왔고, 꽤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박사장으로부터 받게 되면서 기택이네 가족은 이 부잣집의 기생충이 되었다.

  • 영화 '기생충' 스틸컷
    ▲ 영화 '기생충' 스틸컷

    어리숙한 사모님 연교(조여정) 덕에 너무도 쉽게 박사장 저택에 안착한 기택네 가족의 기생생활은 아주 무탈하게 잘 유지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냄새'가 문제다. 뭐라 형용하기 애매한 냄새가 기택이네 가족 모두에게 똑같이 났다. 자꾸 선을 넘는 이 냄새 때문에 박사장의 심기가 점점 불편해지고 있었다.

    자, 이제부터 영화는 '묘한 냄새가 나는 기생충'을 박멸하려는 박사장 가족과 무조건 이 집에 들러붙어 생존을 도모해야 할 기택 가족 사이에 장대한 스릴러가 막 펼쳐질 참이다. 이 얼마나 흥미진진할 텐가. 잔뜩 기대하고 있는 바로 그 때, 인터폰이 울린다.

  • 영화 '기생충' 스틸컷
    ▲ 영화 '기생충' 스틸컷

    영화 '기생충'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그날 밤 인터폰이 울리는 순간부터 관객의 예상을 계속 비켜가는 기괴한 이야기가 몰아친다. 이제 박사장네 저택은 대결의 상대가 아니라 '대결의 장'으로 전락했다. 기택이네와 싸울 진정한 상대는 이 저택의 비밀공간인 지하실에 기생하고 있던 또 다른 가족 '문광(이정은)'과 '근세' 부부였다. 이들은 박사장네 저택, 아니 건축가 남궁현자 선생께서 손수 이 집을 짓고 살고 있었을 더 오래 전부터 들러붙어 있던 진정한 기생충이었다.

    영화 '기생충'은 수많은 리뷰들이 해석했듯 부자와 빈자 사이의 갈등, 다시 말해 계급의 갈등을 봉준호 식의 재치 있는 대조로 도드라지게 다룬 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자꾸만 이 영화를, 부잣집의 기생충 자리를 두고 벌이는 '기택이네'와 '문광 부부'의 처절한 혈투로 보고 있다. 나도 모르는 새 가난한 이 두 집안에 감정이입이 되고 있으니 괜히 마음 속이 뜨끔하다. 혹시 내게서도 '냄새'가 나는 걸까.

  • 영화 '기생충' 스틸컷
    ▲ 영화 '기생충' 스틸컷

    평생 박사장네 가족처럼 돈이 풍족하게 많아 본 적이 없어선지,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본 나는 마침내 괜히 슬퍼진다. 인터폰 화면 속, 실컷 두드려 맞은 문광의 처참한 몰골이 영화 속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이기도 하지만 두 번째 보는 그 모습은 참으로 애달프다. 자기 딴에는 지하에 갇힌 남편이 얼마나 걱정됐을까. 완전영양식품 분유를 젖병에 타서 남편에게 먹이는 문광의 다급한 손길이 그 심정을 다 담을 수 있으려나.

    또 한 장면, 박사장 저택의 주방 벽면에는 식품창고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데 그 입구가 시커멓게 뻥 뚫려만 있다. 건축가 남궁현자 선생은 어찌하여 지하실 입구를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만드셨나 모르겠다. 남편을 찾아 그 계단을 내려가는 문광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무덤으로 찾아 들어가는 것 같아 소름이 끼친다.

  • 영화 '기생충' 예고편 중에서
    ▲ 영화 '기생충' 예고편 중에서

    반지하집에도 한 뼘만큼의 햇빛이 있는데, 그조차도 없는 완벽한 암흑의 지하실에서 '문광 부부'는 영원히 안주할 수 있을 거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을 구하러 지하실로 들어간 그 길로, 문광은 기택의 가족에게 대패하며 속절없이 박멸되었다.

    그 와중에 가운데에 낀 박사장 가족은 쓸데없이 냄새에 예민한 죄로 결딴이 나버렸다. 박사장 가족은 차라리 선의의 피해자에 가깝다. 기택이네 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자들의 평범한 일상 자체가 죄라면 죄였다.

    기택은 그저 반지하집에서나 탈출하고 싶었을 뿐일 텐데 본이 아니게 살인을 저지르고 '문광 부부'의 지하실 기생충 자리를 물려 받았다. 어쨌거나 기생충의 타이틀을 차지했으니 승리라고 봐야 하나.

  • 영화 '기생충' 포스터
    ▲ 영화 '기생충' 포스터

    내게 영화 '기생충'은 가난한 두 집안의 슬픈 '타이틀 매치'로 읽힌다. 지하실에서 밤새 죽어가던 '문광 부부'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충숙 언니가 착한데, 나를 발로 찼어" 문광은 자기를 죽게 한 충숙을 그래도 착하다고 해주며 죽었다.

    그리고 여전히 지하실에서 기생하고 있을 기택에게 아직까지 신경이 쓰인다. 새벽마다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올 때 가정부에게 들키진 않았는지, 마당으로 올라와 이따금씩 햇빛은 쬐며 지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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