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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사후세계로 죽은 이를 인도하는 최초의 존재 ‘저승사자’, 즉 ‘사신(使神)’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왔다. 그래서인지 사신은 흔히 불가사의한 능력이 있는 존재로 그려지는 일이 많다. 하지만 평범한 고등학생이, 그것도 노동 착취 수준의 말도 안 되는 보수를 받는 아르바이트 ‘사신’이 된다면? 이런 만화 같은 상상력으로 출발하는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은 초현실적인 설정과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을 통해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소설이다.
소설은 고등학생 ‘사쿠라 신지’가 동급생 ‘하나모리 유키’에게 사신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으며 시작된다. ‘사신’의 일이란 생전 미련으로 인해 죽은 후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추가 시간을 살아가는 ‘사자(死者)’의 소원을 풀어 저세상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사쿠라는 하나모리와 함께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자들을 만나 그들의 미련을 풀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동생과 관계를 회복하려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여학생, 일정한 직업 없이 가족과 연을 끊고 사회의 불합리함을 저주하던 중년 남자, 남편의 사랑을 원했지만 아이를 낳는 도구로 이용당한 아내 등 다양한 사자들의 미련을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쿠라와 하나모리의 좌충우돌 이야기는 라이트 노블같은 경쾌함을 전해준다. 하지만 가볍게 흘러간다 해서 소설에 담긴 메시지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세상에 미련이 남은 사자가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추가 시간’을 산다는 설정을 통해 작가는 독자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추가 시간’은 사자가 세상에 남은 미련을 풀거나, 체념할 때까지 주어지는 시간이다. 추가 시간 동안 사자는 자신이 죽은 사실이 지워진 세상에서 살아있을 때와 똑같은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의 추가 시간은 사자가 저세상으로 가는 순간 무효화 되어, 이 세상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
저자는 하나모리의 입을 통해 “사자의 추가 시간은 매우 잔인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추가 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사자는 후회되는 과거를 바꿀 수도, 미련을 풀 수도 없는 탓이다. 오로지 사자가 자신의 인생을 정면으로 돌이켜보고,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반추하는 것이 추가 시간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옮긴 이가 권하는 것처럼 ‘추가 시간’에 ‘인생’을 대입하면, 소설은 라이트 노블에서는 흔치 않은 묵직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사자의 ‘추가시간’과 살아있는 우리의 ‘삶’은 결국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가볍게 읽을 수 있어 평소 책을 읽지 않았던 이들도 부담 없이 다가설 수 있는 소설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은 라이트 노블을 좋아하는 이들은 물론, 새해 독서를 하겠다고 결심한 이들의 입문용으로 권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