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워지고 싶은 인간의 본능은 화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시대와 지역에 따라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른 것처럼 화장 역시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 우리나라의 화장은 시대별로 어떤 특징이 있고, 어떻게 변해왔을까? 고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화장의 변천사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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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 백옥 같은 피부를 위한 미백과 피부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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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옥 같은 피부’라는 말이 있다. 예로부터 미인을 말할 때 즐겨 사용해 온 이 표현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오래전부터 하얀 피부를 선호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하얀 피부 선호는 고대의 백색 피부 소유자를 숭상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고조선 시대에는 하얀 피부가 고귀함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일부에서는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가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쑥과 마늘을 먹은 것이 하얀 피부를 만들기 위한 시험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쑥과 마늘은 실제 미백과 잡티제거 등의 효능을 갖고 있다.
이외에 고조선 및 열국시대에 관한 기록에는 겨울에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돈지((豚脂, 돼지기름)’를 바르고, 피부를 하얗게 하려고 오줌세수를 했다는 내용이 남아있어 고대의 사람들이 백옥같이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를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삼국시대 – 기초화장 발달 -
고구려, 백제, 신라의 화장은 각기 달랐지만, 대체로 수수하고 엷은 화장인 담장(淡粧)과 목욕을 통한 피부관리가 주를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면보다는 내면을 중시하는 불교의 영향 때문이다.
고구려인의 화장은 고분벽화를 보고 추측할 수 있는데, 눈썹은 짧고 뭉툭하게 다듬고 이마, 뺨, 입술 등에 연지를 바른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에서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도 화장했으며, 굴참나무나 너도밤나무의 재를 기름에 갠 미묵으로 눈썹을 그렸다.
백제인들은 삼국 중 가장 엷은 화장을 했지만, 일본 옛 문헌인 ‘삼재도회(三才圖會)’에는 백제로부터 화장품 제조기술과 화장기술을 익혔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화장과 관련한 문화가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화장술이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를 대표하는 화랑은 얼굴에 분을 바르고, 귀를 뚫어 귀고리를 했으며, 구슬로 장식된 모자를 써 외모를 더욱 아름답게 했으며, 여성들의 화장도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훨씬 짙고 화려했다.
이외에 신라인들은 목욕할 때 쌀겨나 팥, 녹두, 콩 껍질 등을 이용해 매끄럽고 흰 피부를 가꿨다. 이중 일반인들이 많이 사용한 ‘조두(澡豆)’는 녹두와 팥을 갈아 만든 비누의 일종이었는데, 사용 후 곡식의 날 비린내가 심해 이를 가리기 위한 향수나 향료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통일신라시대 – 납을 섞은 연분 등장 -
신라의 화장 풍조는 통일신라까지 이어졌으며, 중국의 영향을 받아 더욱 화려해졌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발달한 화장술만큼 다양한 화장품과 화장 도구가 개발되었는데, 그중 쌀가루 등으로 만들어 접착력이 약한 백분에 납을 섞어 접착력과 퍼짐성을 강화한 연분의 개발이 가장 획기적이었다고 보고 있다.고려시대 – 화장의 발달과 계층에 따른 화장법 이분화 -
고려 시대에는 정신과 육체는 높고 낮은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 하나라는 ‘영육일치(靈肉一致) 사상에 의해 화장문화가 더욱 발달했다. 또, 고려 시대는 계층에 따라 화장법이 최초로 이분화된 시대이기도 하다.
중국 원나라 사서인 ‘송사(宋史)’에는 고려 여인들이 짙은 화장을 즐기지 않아 분은 사용하지만, 연지를 사용하지 않았고, 버드나무 잎같이 가늘고 아름다운 눈썹을 그렸으며, 비단향료주머니를 차고 다닌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일반 여성들에 국한된 것으로, 기생 등 특수층 여성들 사이에는 짙은 화장인 분대화장(粉黛化粧)이 유행했다. 백분을 많이 발라 얼굴을 하얗게 만들고 눈썹을 그리고 연지를 바르는 등 짙은 화장인 분대화장은 기생의 상징이 되어 화장을 경시하는 풍조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고려 시대의 화장품과 화장 도구는 조선 시대보다도 훨씬 다양하고 뛰어났다. 고려인들은 수입 수은으로 만든 거울을 사용했고, 크림의 일종인 면약(面藥)으로 피부를 가꿨다. 손톱을 다듬는 용도의 족집게도 있었으며, 머리 염색도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상류층 사이에는 복숭아 꽃물이나 난초를 우린 물에 목욕하는 것이 유행했는데, 이런 목욕법은 살결을 희고 부드럽게 하는 효과를 내고 몸에서 향이 나도록 했다.조선시대 –화장의 세분화 -
유교의 영향으로 근검, 절약이 강조됐던 조선 시대의 화장술과 화장 도구는 고려 시대보다 훨씬 간소화되었다. 또 외모보다 마음가짐을 중요하게 여김에 따라 본 모습이 크게 바뀌지 않는 은은한 화장인 담장(淡粧)을 주로 했다.
하지만 소실, 기생, 궁녀 등 특수층 여성들은 더욱 짙은 화장인 농장(濃粧)을 했다. 이는 아내나 며느리는 건강하고 부지런하며 성격이 원만한 여성을, 기생이나 소실에게는 팔등신의 미인상을 바라는 남성들의 이중적인 여성상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짙은 화장은 모습을 완전히 바꾸는 야용(冶容)이라며 경멸했으나, 일반인들도 혼인날만큼은 응장성식(凝粧盛飾)이라 해 이마와 양 볼에 연지를 찍어 바르는 등 진한 화장과 화려한 치장을 했다.
조선 시대에는 남성들도 몸을 단장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선비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돈하고, 피부를 하얗게 하기 위한 분 세수를 했으며, 향낭을 달고 다녔다.
조선 시대의 화장은 개화기 이후 외국에서 화장품이 들어오면서 크게 발달했지만, 요즘의 로션에 해당하는 미안수나 팩처럼 꿀 찌꺼기를 붙였다 떼거나 오이 꼭지를 얼굴에 문지르는 등의 미안법이 이미 존재했고, 피부를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인삼탕에 목욕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 김정아 jungya@chosun.com
- 서유남 ijabel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