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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vs. 영화] 가비

기사입력 2017.02.01 16:29
  •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들어온 것은 조선 말기다. 당시 커피는 왕실과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귀한 기호품으로, ‘가비(加比)’, ‘가배(伽排), ‘양탕(洋湯)’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개화기의 커피는 흔히 대한제국의 1대 황제인 고종과 함께 거론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맛본 사람이라고도 알려진 고종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한 커피 애호가였기 때문이다.

    고종의 남다른 커피 사랑은 1898년 ‘김홍륙 독다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역관 김홍륙이 커피에 과량의 아편을 타 고종을 독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고종이 평소와 향이 다르다며 커피를 곧바로 뱉어내는 바람에 미수로 그치고 말았지만, 함께 커피를 마시던 황태자는 피를 토하고 쓰러져 수개월을 병상에서 지내야 했다.

  • 시대의 이야기꾼이라 불리는 김탁환은 이런 개화기의 혼란스러움과 커피, 그리고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버무려 소설 ‘노서아 가비’를 완성했다.

    소설은 여러모로 새로운 면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사기꾼, 커피, 드레스 등의 소재를 자유분방하게 펼쳐놓는가 하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따냐’의 캐릭터도 남다르다. 따냐는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 일리치의 목숨 앞에서도 “아이는 아이고 사기는 사기죠”라고 말할 정도로 어떤 이데올로기나 사랑에 매달리지 않는 강단 있는 여자다.

    글자 그대로 바람같이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소설은 독자의 고정관념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매력적인 소재와 함께 반전에 반전을 선사하는 소설은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았고, 2009년 베스트셀러에 가뿐히 등극할 수 있었다.

  • 영화 '가비' 스틸컷
    ▲ 영화 '가비' 스틸컷

    소설은 2012년 영화 ‘가비’로 재탄생 되었다. ‘커피’와 ‘고종독살음모’라는 매력적인 소재에 ‘접속’, ‘텔미썸딩’의 장윤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는 제작 초기부터 화제를 모았고, 52억 원이라는 막대한 제작비와 대대적인 홍보 마케팅으로 관객의 기대를 한껏 높여놓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연 영화는 실망스러웠다. 같은 배경에 같은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원작의 재미를 전혀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개화기의 유쾌한 사기꾼의 활극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영화는 일리치(주진모)-따냐(김소연)-고종(박희순)의 삼각 로맨스에 집중한다. 소설의 따냐와 일리치는 사기 앞에서는 사랑조차 가차 없이 내던지는 뼛속까지 사기꾼인 캐릭터지만, 영화의 따냐와 일리치는 애국심과 사랑에 목숨 거는 전형적인 인물로 변모했다.

    영화만의 재미를 위해 투입했다는 조선계 일본인 ‘사다코(유선)’의 존재도 유명무실하다. 사다코는 러시아에서 사기꾼으로 이름을 날리던 일리치와 따냐를 고종독살음모에 끌어들인 이후에는 어떤 활약도 보여주지 못한다. 이밖에 어색한 분장과 CG, 어설픈 애국심을 고취하는 결말 등도 영화에 대한 실망을 부추기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한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 작품은 어쩌면 영화와 원작의 비교가 무의미한지도 모르겠다. 원작을 보지 않았더라면 영화를 특이한 소재를 매개로 한 우아한 로맨스로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원작이 선사한 신선함과 경쾌함을 생각하면 영화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짙게 남기에, 뻔한 레퍼토리를 늘어놓는 영화보다는 단연코 소설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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