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일반

[남프랑스 '알비(Albi)'] (2) 미술계의 이단자이자 아웃사이더였던 화가 '로트레크'의 삶

  • 글=스타일조선 피처 디렉터 고성연
  • 편집=디지틀조선일보 서미영 pepero99@chosun.com
기사입력 2016.12.07 16:12
  • 원래 주교의 거주지로 사용됐던 베리비 궁이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로트레크 뮤지엄의 외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로트레크 작품이 소장돼 있다.
    ▲ 원래 주교의 거주지로 사용됐던 베리비 궁이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로트레크 뮤지엄의 외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로트레크 작품이 소장돼 있다.
    알비는 ‘미술계의 이단자’이자 진정한 ‘아웃사이더’ 화가 로트레크의 자취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만으로도 기꺼이 찾는 열성 팬을 거느린 곳이기도 하다. 특히 그가 일본 판화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배경 덕분에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로트레크는 이 지역 최고의 명문가 자제로 태어난 귀족 출신이었지만, 가문의 오랜 근친 결혼 탓인지 유전적 결함을 지녀 어릴 때부터 심히 병약했다. “타고난 뼈대가 너무 약했던 그는 살짝 넘어졌는데도 두 차례 심한 골절을 당했는데, 왼쪽 허벅지, 그리고 오른쪽 허벅지 뼈를 다쳤다.” 부친인 알폰소 백작의 회고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10대 중반에 사고를 겪으면서 하반신 성장이 멈춰버리는 불운까지 맞닥뜨렸다. 그래서 150cm가 간신히 넘는 작은 키와 신체적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됐고, 병상에 누워 소일거리로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을 달랬다.

    배경만 보면 왠지 모르게 음울하게 지냈을 것 같지만, 그는 대도시 파리에서 유학하고 일하면서 누구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흥겹게 살았다. 카페, 댄스홀 등을 돌아다니면서 화려한 불빛 속에서 유흥을 즐긴, 매우 사교적인 인물이었다. 큰 웃음소리로 어딜 가도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고 할 정도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몹시도 고독에 시달렸고, 자신을 손님이라기보다는 친구처럼 대해주는 창녀촌에 자주 들러 그들에게 위로를 받았다. ‘그녀’들은 그의 뮤즈이자 모델이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가족, 하인, 가축 등에 둘러싸여 자란 로트레크는 대상의 형태나 움직임을 포착하고 그려내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초점은 언제나 ‘인물’이었고, 그런 관심과 능력은 절제된 회화 수단을 포스터에 활용하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빛을 발했다. 온몸의 세포를 불살라버리려는 듯 쉬지 않고 스스로를 가만놔두지 않았던 그는 결국 알코올 의존증으로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로트레크 뮤지엄의 내부.
    ▲ 로트레크 뮤지엄의 내부.
    로트레크의 모친은 소중한 아들의 작품을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하려고 했으나 매춘부들과 적나라한 유흥 문화를 반영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1922년, 모친이 보관하던 대부분의 작품은 현재의 로트레크 뮤지엄에 기증됐다. 널리 알려진 ‘파리 카바레(Parisian Cabaret Posters)’의 원본을 비롯해 1천 점이 넘는 회화, 스케치, 석판 인쇄물(litho-graphs) 등 세계에서 가장 많은 로트레크의 작품이 바로 여기에 소장돼 있다. 원래 주교의 거주지로 사용되던 베리비궁이 탈바꿈한 이 미술관은 격동적이었던 작가의 삶과 다채롭고 진취적인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보고다.


    외로웠지만 누구보다 쾌활하고 편견이 없었던 영혼
  • Henri de Toulouse Lautrec, ‘Yvette Guilbert Saluant’(1894).). ©Muse´eToulouse-Lautrec, Albi, Tarn, France.
    ▲ Henri de Toulouse Lautrec, ‘Yvette Guilbert Saluant’(1894).). ©Muse´eToulouse-Lautrec, Albi, Tarn, France.
    로트레크는 재주 많은 풍운아 정도로 취급받기도 하지만, 작품에 동시대의 풍속을 직설적으로 담아냈으며 미적 표현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아끼지 않은, 혁신적인 면모가 풍부한 작가였다. 또 ‘똘끼’로 여겨질 만큼 장난기가 넘치기도 했다. 검은색 긴 장갑이 트레이드마크였던 당대 최고의 가수 이베트 길베르(Yvette Guilbert)와의 에피소드는 로트레크의 이런 면모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포스터의 달인’이었던 로트레크는 30대 중반이던 이베트를 그렸는데, 누가 봐도 꽤 나이 든 여인처럼 느껴졌다. 이베트는 로트레크가 자기를 90대처럼 늙고 추하게 표현했다고 불평했지만, 그는 사실 아래에서 비추는 조명 때문에 생기는 그림자를 표현하는 데 충실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오른 이베트는 항의를 거듭하면서 “감히 내 얼굴을 포스터에 담지 마라”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이에 장난기가 발동한 로트레크는 그녀의 검은색 장갑만 강조하고 얼굴은 생략해버린 채목부터 아래까지 그려진 포스터를 만들어 시내에 뿌려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은 굉장한 악연으로 남았지만, 그의 과감한 표현 방식 덕에 로트레크라는 인물과 재능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 Henri de Toulouse Lautrec,‘Cocyte dans '' La Belle H´el e ` ne’, Bordeaux(1901).©Muse´eToulouse-Lautrec, Albi, Tarn, France.
    ▲ Henri de Toulouse Lautrec,‘Cocyte dans '' La Belle H´el e ` ne’, Bordeaux(1901).©Muse´eToulouse-Lautrec, Albi, Tarn, France.
    로트레크의 물랭루즈 포스터에 자주 등장한 제인 아브릴(Jane Avril)도 그의 뮤즈로 유명하다. 우아한 외모와 달리 후원자의 음식을 훔치길 좋아했다는 이 댄서는 어린 시절 병을 앓은 로트레크와의 공통분모도 있지만 키가 크고 말라서 그와는 대조적인 면을 동시에 지녔다.

    제인이 등장하는 그의 포스터를 보면 일본 판화 기법의 영향, 입체식 페인팅 기법과는 다르게 평평하지만 강한 색감과 비대층의 구조가 눈길을 끈다. 눈에 띄는 타이포그래피로 작업의 주제와 주체를 확실히 나타냈으며 배경을 패턴으로 채운 그의 감각은 ‘20세기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누구보다 외롭고 슬펐지만 동시에 활달하고 유쾌한 삶을 살았고, 섹스를 매개로 돈을 쟁취하는 창녀들을 때로는 조롱하면서도 그들과 인간적인 사랑을 나눴으며, 그런 행동을 굳이 미화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던 로트레크. 그의 혁신적인 포스터와 매춘을 주제로 한 그림이 피카소에게 큰 영감을 줬고, 강렬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의 인물들은 훗날의 표현주의와 맥락이 닿는다는 점에 비춰볼 때 우리는 이 ‘작은 거인’의 자유롭고 위대한 예술혼을 좀 더 진지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글=스타일조선 피처 디렉터 고성연
  • 편집=디지틀조선일보 서미영 pepero99@chosun.com

최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