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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능이 오른쪽으로 치우친 이유는?

기사입력 2017.12.05 09:40
  • 융릉과 정자각
    ▲ 융릉과 정자각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융릉(隆陵)은 조선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무덤이다. 영조 38년(1762년)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는 원래 배봉산 아래 언덕에 예장되었으나, 그의 아들인 정조 즉위 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으며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억울한 아비의 죽음을 위로하고 싶은 정조의 노력으로 융릉은 어느 조선왕릉보다 화려하다. 봉분 아랫부분에는 목단과 연꽃 문양이 양각된 12면의 병풍석이 감싸고 있으며, 봉분 뒤쪽 3면으로는 나지막한 담인 곡장(曲墻)이 둘러져 있다. 곡장은 검소함을 중시한 유교사상에 의해 세조 이후로 금지된 것이었다. 이 외에 융릉 주위로는 상석, 망주석, 팔각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 석마 등의 석물이 세워져 무덤을 지키고 있다.

    조선왕릉 앞에는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인 ‘제향’을 올리기 위한 고무래 정(丁)자 모양의 정자각이 지어져 있다. 왕의 신주를 모시는 곳인 정자각은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하는 영역으로 실제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왕의 무덤을 감히 볼 수 없다고 해 발을 늘어트리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정자각을 능 앞에 지은 것도 같은 이유로 정자각에 능이 가려져 쉽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융릉은 예외로 정자각의 우측으로 벗어나 멀리서도 한눈에 올려다보인다. 융릉의 위치가 여느 능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융릉의 위치가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는 이유는 바로 정조의 효심 때문이다. 뒤주 속에서 참혹하게 죽은 아비가 죽어서까지 답답한 것을 원치 않은 아들은 죽은 아비에게 탁 트인 전망을 선사하기 위해 궁중의 예법을 어기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한편 융릉은 태조의 건원릉, 세종대왕의 영릉과 함께 조선 왕릉 중에서도 최상의 길지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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