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일반

[우표 이야기] 민족계몽 운동가 도산 안창호 눈을 감다

기사입력 2016.03.10 08:59
1938년 3월 10일, 투옥끝에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하던 중 사망
  • 사진=한국우표포털사이트
    ▲ 사진=한국우표포털사이트

    안창호(安昌浩, 1878. 11. 9 ~ 1938. 3. 10) 호는 도산(島山) 이명으로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 등을 사용하였다. 평남 강서 출신으로, 열여섯살 되던해 청,일전쟁을 피해 서울로 피난하였다가 신식학문을 배우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자주독립의 국민의식을 강조하며 강연을 하러 다녔다.

    이때, 일본의 탄압으로 독립협회가 해체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교육과 전도에 힘썼으며,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웠다. 올바른 교육자가 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1902년 미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한인 공동 협회를 만들게 된다. 그곳에서 공립신보를 발간하여 교포들의 권익보호, 생활향상에 이바지 하였다.

    그는 일생을 정직과 성실로써 국가에 헌신한 항일 독립투사였으며, 민족사업 육성과 지도적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을 맺은 소식을 듣고 1906년 다시 귀국하여 양기탁 신채호와 함께 비밀 단체조직인 신민회를 만들고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다.

    '105인 사건'으로 인해 신민회가 해체되자, 1913년 미국으로 넘어가 흥사단을 조직하고 이후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업적을 남겼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에 진력하였으나 1932년 윤봉길 의사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 되었다. 그 이후 가출옥하여 휴양 중 또다시 동우회 사건에 연루되면서 재투옥되었다. 그 중 병세가 악하되고 1938년 병으로 보석되었지만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만 59세로 사망하였다. 그 때의 일제는 선생의 서거로 인하여 시위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소수 인원들만 참석하게 하고 장례식을 치뤘다.

    1973년 강남에 도산공원을 조성하고 유해를 이곳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그의 기본사상은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독립을 위해 민족의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흥사단 정신은 오늘날에도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도 큰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로스앤젤레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우체국도 지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매해년 3월 10일이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도산공원에서 추모식을 열고 있다.

    ※ 도산 안창호(두산백과)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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