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일반

[심형철의 실크로드 기행] #9 교하고성(交河故城)과 고창고성(高昌故城)

  • 중국 민족학 박사 심형철
기사입력 2015.11.11 02:00
  •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보면 과거의 영화를 간직한 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폐허로 남아 나그네를 맞이하는 유적지가 많다. 그 중 교하고성과 고창고성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역사적인 명소이다.

  • 교하고성
    ▲ 교하고성
    답사 과정 중에 날씨가 가장 뜨거운 날 교하고성을 둘러보게 되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지역을 땡볕에 그것도 섭씨 43℃라는 날씨에 걷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극기 훈련에 다름없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하고성의 지리적인 특징은 강 가운데 있다는 것인데, 우리나라 여의도의 축소판이다. 길이 1,650m, 폭 300m인 이 섬의 주위는 모두 절벽으로 천연 요새로서의 특성을 고루 지니고 있다. 강물이 이 섬으로 인해 잠시 갈라졌다가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에 교하고성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한자식 표기이고 현지인들은 야르허투라고 부른다. ‘야르’는 웨이우얼어로 ‘절벽’이란 뜻이고, ‘허투’는 몽고어로 ‘도시’라는 뜻이다. 그 뜻을 연결하면 절벽 위에 지은 도시가 되는데 웨우얼어와 몽고어로 합성된 지명이 특이하다.

    교하고성은 고대 서역의 36국가 중 차사전국(車師前國)의 도읍지로 투루판 시의 서쪽 약 10㎞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6세기 초 이 지역에 성을 짓기 시작하였고, 지금 현존하고 있는 성의 흔적은 당나라 때의 건축물이다.

  • 교하고성
    ▲ 교하고성
    성내로 들어서면 남북을 잇는 폭이 3m인 도로가 1㎞나 뻗어있다. 이 중앙도로를 중심으로 작은 골목들이 가로 세로로 연결된다. 성안에는 행정기구, 사원, 불탑, 상점, 서민 가옥의 흔적이 있고, 강물을 퍼 올리는 우물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오랜 세월에도 지금까지 흙으로 쌓은 성터의 원형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비가 오지 않는 건조한 기후 때문이다. 건축 구조는 흙으로 된 언덕에 굴을 파고 거주하는 형식이었다. 이는 덥고 건조한 날씨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으로 지금도 안에 들어가 보면 내부 구조가 상당히 짜임새 있게 설계되어 있다. 

    건조한 기후 덕에 세월의 무게에 비해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만 세월에는 장사가 없는 법, 과거의 화려하고 사람들의 땀 냄새가 풍기던 분위기는 역사 속에 묻히고 지금은 바람에 지친 몸을 식히며 누워있다. 세월의 무상함을 더욱 일깨우는 것은 교하고성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양쪽 강물이 다 말라버렸다는 사실이다. 기록에는 양쪽에 폭이 100m, 깊이가 30m나 되는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허연 바닥을 드러낸 채 몹시 목말라 하는 것이 세월의 덧없음을 보여준다. 세월의 무게도 메마른 기후도 극복하고 유일하게 남은 것은 아직도 물을 잉태하고 있는, 속이 깊은 우물뿐이다.

    교하고성은 실크로드의 한 거점으로서, 또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토성으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94년부터 2년 간 유네스코의 유적 발굴이 진행되었으며, 현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 고창고성
    ▲ 고창고성
    고창고성은 투루판에서 동쪽으로 약 50㎞, 훠옌산 아래 위치한다. 태양이 뜨면 붉게 타오르는 훠옌산과 서쪽으로 구불구불 길게 흐르고 있는 무터우꺼우(木頭溝)가 고창고성을 감싸고 있다.

    기원전 104년 이광리(李廣利)가 대완국[大宛國, 현재의 키르키르스탄 지역]으로 한혈마[汗血馬, 돌을 밟으면 자국이 나고, 피와 같은 땀을 흘리며 하루에 1,000리를 달린다.]를 구하기 위해 진군하던 중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장안(長安)을 떠나 천 리 길, 고비사막을 횡단하여 진군한 군마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이 때 눈앞에 시원한 물줄기와 푸른 초원이 그림 같이 펼쳐진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장군은 즉시 명령을 내려 성을 쌓고 더 이상 진군할 수 없는 부상자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지세고창(地勢高敞), 인서창성(人庶昌盛)’, 즉 ‘지세가 높고 평탄하며 사람이 번성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곳의 이름을 ‘고창’이라고 지었다.

  • 고창고성
    ▲ 고창고성
    당의 세력이 약해진 9세기 중엽, 몽고 초원에서 이주해 온 회골(回鶻)족이 고창에 회골왕국을 건립하였다. 회골족은 성을 재정비하고 독립 국가를 유지하다가 13세기 말 몽고군에 의해 폐허가 되는데, 이로써 1천 4백여 년간 부침하던 고창고성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고창고성은 사각형의 외성과 내성이 있는데 외성의 둘레는 5㎞이고 내성의 둘레는 3,6㎞이다. 원래 성벽은 높이가 약 12m 정도였으나 거의 허물어져 군데군데 남아있는 야윈 몸체만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성안에는 4층높이, 둘레가 700m 정도로 추정되는 궁궐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면적이 1㎢나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불교 사원과 마니교(摩尼敎),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경교(景敎) 사원이 함께 있었다. 이것은 고창고성이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으로서 동서양의 종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고창고성
    ▲ 고창고성
  • 중국 민족학 박사 심형철

최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