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다닥 왔다 떠나는 여행자이기 보단 몇 마디 말이라도 나눈 친구이고 싶었다. 조금이나마 익혀둔 네팔어가 꽤나 요긴했다. ‘말’이 통했을 때 그들은 여행자를 향한 빗장을 열고 친구로 맞아주었을 뿐더러 상점에선 물건 가격이 내려가기도 했다. 인연은 곳곳에서 이어졌다. 무작정 찾아간 영화관에선 태권도를 배우는 두 친구를 만나 한바탕 수다를 떨었고, 돌아오는 길엔 게스트하우스 직원과 예상치 못한 '한국어 프리 토킹' 시간을 갖기도 했다. 한국과 크고 작은 인연을 맺고 있는 이들을 만나니 네팔, 이곳이 퍽 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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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코리아바터 아에”(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어디에서 왔냐는 질문에 네팔어로 답하자 트레킹 장비 상점 주인이 깜짝 놀란다. 언제 들었는지 옆 가게 직원까지 와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누구한테 배웠냐’, ‘네팔에는 왜 왔냐’ 각종 질문을 쏟아낸다. 예전에 5개월 정도 살았고 카트만두에 친구가 있다는 말에 호감 급상승.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점 주인은 내게 발음이 좋다며 엄지를 치켜세우더니, 서양인들은 발음이 좋지 않다며 “나마아스떼에~” 혀를 굴리며 짓궂게 따라한다. 그러더니 처음에는 네팔에 ‘드라마틱 체인지’가 있었다며 절대 못 깎아주겠다던 등산복 바지 가격이 내려간다. 결국 처음에 등산바지는 1000루피, 슬리퍼는 200루피 불렀던 것을 두 개 합해 1000루피에 구입. 나중에 트레킹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그 정도면 괜찮은 가격이라며 자기도 등산복 바지가 필요한데 어디서 샀느냐 묻는다. -
네팔의 물가는 한국에 비해 매우 저렴하지만 상인들은 외국인에겐 비싼 값을 부른다. 마을에선 그렇지 않지만 타멜이나 포카라같이 여행객들이 몰리는 곳에는 더욱 그 차가 크다. 즉 쉽게 ‘호갱님’이 되어버리는 수가 있다. 이럴 땐 짧은 네팔어 실력일지라도 빛을 보곤 한다. 웬만한 영어는 다 통하는 네팔에서 서양 여행자들은 굳이 네팔어를 배우거나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간단한 네팔어만 사용해도 현지인들은 크게 반가워한다. 물론 물건 값을 더 잘 깎을 수 있는 방법은 여럿 있을 테지만, 네팔어로 하는 흥정은 현지인과의 즐거운 대화에 가격 할인까지 얻은 셈. 말하자면 남는 장사다.
택시 타고 골목 하나 꺾었는데 150루피…네팔어도 힘을 못 쓰네
하지만 짧은 네팔어가 모든 곳에서 통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바로 몇몇 택시기사의 경우다. 포카라에서부터 7시간 버스를 타고 카트만두에 왔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근처 택시를 잡았는데 내 숙소까지 200루피라길래 네팔어로 흥정해 150루피에 탄다. 근데 웬걸, 정확히 골목 하나 꺾었는데 다 왔단다. 너무 비싸다 항의했지만 택시기사는 요지부동. 게다가 왜 내가 150루피를 내야 하는지 속사포처럼 네팔어를 쏟아낸다. 나는 결국 100루피를 내고서야 내렸다. 여행지에서 아주 많은 외국인들을 상대해봤을 택시기사에게 짧은 네팔어는 별 소용이 없었다. 유창하게 하면 결과가 달랐을까. -
네팔 영화관에서 만난 태권도 아가씨들
도대체 입구가 어딜까. 분명 택시 기사가 영화관이라고 내려줬는데…. 12시와 3시, 하루 딱 두 번 상영하는 영화 시간을 놓칠까 조마조마하다. 한참을 헤매는데 스쿠터에서 내린 두 젊은 여성이 길을 알려준다. 매표소 좌석은 플래티넘-골드-실버 세 종류. 비싼 게 좋은 자리겠거니 플래티넘을 구매했는데 웬 빨간 종이를 내어준다. 이건 뭐지? 영화티켓인가. 1층 매점에서 시원한 음료수까지 사가지고 가운데 자리를 잡는다. 아, 어떤 영화가 나올까. 기분이 한껏 들떠 영화가 시작하길 기다리는데 아까 매표소에서 본 여성들이 옆자리에 앉는다.“네팔어도 모르는데 네팔 영화를 보러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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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내 짧은 네팔어는 네팔 영화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 터. 사실 영화 제목도 모르고 왔다. 나의 이런 용기(?)에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린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냐며 외국인은 처음이란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크게 반가워하며, 자신들은 영화가 끝나고 태권도 수업을 받으러 간다고 한다. 어쩐지 트레이닝복을 아래위로 입고 스쿠터를 탄 모습이 범상치 않아 보이더라니…. 이 태권도 아가씨들은 신이 나서 한국 대학생들과 태권도 수업을 받는 스마트폰 사진을 여럿 보여준다. 이렇게 시작된 폭풍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메이드인 코리아’면 믿고 물건을 산다는 둥 김범과 김현중 팬이라는 둥 한국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공중부양 날라차기는 기본…‘오, 이런 리얼한 영화가 다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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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속 시작된 네팔 영화 ‘스투피드 먼’. 주인공 남녀가 갖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결국엔 사랑을 이루는 그렇고 그런 러브스토리다. 다른 점이 있다면 중간 중간 등장하는 패거리 싸움 장면. 그냥 때리는 법이 없이 360도 회전은 기본이요, 공중부양까지 해서 발길질을 날린다. 맞는 사람도 그냥 얌전히 맞는 게 아니다. 한 대 맞았는데 덤블링을 하며 뒤로 휙 나가떨어진다. 터진 입술에서 나는 피도 그냥 빨간색이 아니라 아주 새빨간색이다. 오, 이런 리얼한 영화를 봤나. 한국에서도 폭력적인 영화를 여럿 봤지만 이런 적나라함은 처음이다. 한손으로 눈을 가리며 움찔움찔하자 옆 친구들이 깔깔 웃는다. 흔한 러브스토리에 브레이크 타임까지 있지만 지루할 새가 없는 네팔 영화.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비할 수는 없지만 색다른 매력을 뽐낸다.
레크“올드포카라 간다며, 어떻게 가는 줄 아니?”
나“아니 몰라. 버스나 택시 타고 가지 뭐”
레크“버스는 어디서 타는 지 알아?”
나“아니 몰라, 물어보지 뭐”
영화를 함께 본 레크와 라키, 길도 모르면서 무작정 올드포카라에 가겠다는 이 외국인 앞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몇 번을 어떻게 갈 거냐 묻더니 혼자 보내기 불안했는지 레크가 자신이 스쿠터에 타란다. 한국에서 오토바이는 노는 언니의 전유물(?)로만 알고 있던 터였지만 네팔에선 스쿠터 타는 여성을 여럿 본 터라 낯설지는 않다. 엉겁결에 시작된 올드포카라 라이딩. 그런데 이 친구, 곧 태권도 수업이 시작한다며 속도를 자꾸만 올린다. 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중앙선 없는 도로에서 경적을 빵빵 울리며 달리는 버스, 자동차, 스쿠터…. 공포가 엄습해온다.“꺄악~! 제발 천천히 달려~”
이런 나의 격한 반응에 레크는 그저 “아임 굿 라이더”라며 자신을 믿으란다. 아니 난 헬멧도 안 썼는데…. 가이드북에선 네팔이 다른 개발도상국보다 교통사고 사망률이 30배 높다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단 생각에 레크의 양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붙잡는다. 흙먼지 속을 헤집고 다닌 폭풍 라이딩. 순식간에 스쿠터를 타고 올드포카라를 한 바퀴 돌고 숙소가 있는 레이크사이드에 도착했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잔 말을 남긴 채 태권도 수업을 받으러 쌩 사라진 레크. 머리가 띵하다. 아뿔싸, 거울을 보니 머리카락에 흙먼지가 뒤엉켜 있는 것은 물론이요, 아이라이너는 아래위로 번져있고 얼굴엔 웬 검은 벌레까지 붙어있다.한국어로 말 걸던 네팔인 남자,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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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저녁, 영화관에서 만난 네팔인 두 친구와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웬 남자가 자꾸 날 부른다. 어설픈 한국말로 말을 이어가던 그는 한국의 동대문에서 3년 반을 일했다는 32세의 프라카스. 내가 묵는 숙소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데 네팔어를 하는 한국인이 왔다며 친구가 신나서 말해주더란다. 오! 네팔에서 한국말을 쓰게 되다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아 근데, 한국에서 일을 했다고? 혹시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차별을 받다 온 건 아닐까. 걱정이 스친다.
“몸이 아파서 네팔에 돌아왔지만 다시 한국에 가고 싶어”
휴 다행이다. 프라카스는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 길을 잃어버려 한참을 헤맸는데 한국 사람들이 어디서 버스를 타야 하는지 너무 친절하게 알려줬다며 한국 사람이 좋다고 한다. 나도 가만히 칭찬을 듣고 있을 수만은 없지. 네팔인도 친절하다며 내가 변기통에 스마트폰을 빠뜨렸는데 네팔인 친구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빌려준 일화를 들려주었다. 오랜만에 한국인을 만나 너무 기쁘다는 프라카스는 특히 한국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이야기를 하면서는 크게 웃으며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다.“내가 밤 10시에 일이 끝났는데 드라마는 꼭 보고 잤다니까. 하하”
솔직히 드라마를 안 보는 나로선 ‘제빵왕 김탁구’라는 드라마가 있었다는 정도밖에 몰랐다. 하지만 프라카스는 내가 그 드라마를 안다는 것 자체에 기뻐하며 한참 눈을 반짝이며 드라마 얘기를 한다. 하기야 그동안 네팔에서 제빵왕 김탁구 이야기를 함께 나눌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네팔에 머무는 짧은 기간 동안 한국과 인연이 있는 네팔인들을 꽤 많이 만났다. 저녁 식사를 같이 한 프라티(레크의 또다른 친구)도 오빠가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고, 레이크사이드의 선물 가게 여주인도 남편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트레킹 가이드인 미나의 친구 역시 한국의 농장에서 일하다 왔다고 했다. 비록 너무 추워서 몇 달 만에 그만 뒀다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네팔인들이 한국행을 택할까.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기억들을 담게 될까.
- 글,사진 오은영 aurora1024@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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