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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메이커' 조선시대 왕의 탄생을 도운 사람은 누가 있을까?

기사입력 2017.08.21 09:35
  • 조선시대 왕위는 왕의 장남에게 계승되는 것이 정석이었으나,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의 장남으로 왕위를 계승 받은 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단 7명뿐이었다. 조선시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정치적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왕 중에는 태종과 세조와 같이 자신의 의지로 왕이 된 이도 있으며, 정치싸움 속에 어부지리로 왕위에 오른 이들도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혼자만의 힘으로 왕위에 오르기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처럼 조선왕조 500년 동안 새로운 왕의 탄생을 도운 이들은 누가 있을까? 조선시대 킹 메이커를 살펴보자.

    ◇ 태종 – 원경왕후, 이숙번, 하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태종)은 두 번의 왕자의 난 끝에 조선 제3대 왕이 되었다.

    태종의 왕위 옹립에 가장 큰 공을 세운이는 부인 민씨(원경왕후)와 이숙번이다. 이들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이방원이 왕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방원이 왕이 된 후 이들은 왕권강화를 위해 철저히 버림받고 말았지만, 태종이 왕이 될 수 있게 만든 1등 공신임에는 틀림없다.

    이방원이 왕이 되기 전부터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하륜은 태종이 왕이 되는 것은 물론 진정한 군주로 거듭나는데 큰 힘을 보탠 인물이다. 하륜은 이숙번을 태종에게 소개했으며,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이 세제에 오를 수 있게 정종을 설득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륜은 끝까지 태종의 곁에 남아 조선왕조 최고 정책결정기구인 의정부 제도를 정립하고, 대동법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태종이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데 큰 힘이 되었다.

    ◇ 세조 – 한명회, 신숙주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 문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다.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 쿠데타인 계유정난의 모든 책략은 한명회로부터 나왔다. 한명회는 뛰어난 지략으로 세조에게 ‘장자방(張子房, 중국 한나라의 책략가)’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으며, 자신의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 보내어 왕의 장인으로서 당대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한명회가 계유정난을 통해 세조가 왕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면, 신숙주는 세조의 왕좌를 굳히는 역할을 했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 황제의 승인이 있어야 왕위 계승이 인정되었는데, 신숙주가 사은사로 발탁되어 세조의 왕위 승인을 무사히 마쳤던 것이다. 신숙주는 세조가 “당 태종(唐太宗)에게 위징(魏徵)이 있었던 것과 나에게 신숙주(申叔舟)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깊은 신임을 받았으며, 최고의 참모로 세조가 다방면에 업적을 쌓는데 공헌했다.

    ◇ 성종 – 정희왕후, 한명회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성종)은 어수선한 시국에 할머니 정희왕후와 장인 한명회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 세조가 승하한 후 왕위는 요절한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 대신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에게 돌아갔지만, 얼마 되지 않아 예종 역시 승하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는 예종의 뒤를 예종의 장남인 제안대군이 이어야 했지만, 당시 제안대군은 3세에 불과했다. 이런 시국의 혼란을 틈타 왕실의 최고 어른인 세조비 정희왕후와 당시 최고 권력을 누리고 있던 한명회가 발 빠르게 자산군을 왕위에 올리기로 합의해 성종이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 중종 – 성희안, 박원종

    중종은 1506년에 중종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한 연산군 폐위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고, 성희안,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것이다. 중종 역시 쿠데타를 통해 왕위에 올랐지만 자신의 의지로 쿠데타를 일으킨 태종, 세조와는 차이가 있다.

    ◇ 선조 – 이준경, 인순왕후

    선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준경과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다.

    1567년 명종이 후사를 정하지 못한 채 승하하게 되자, 이준경은 의식이 희미한 명종을 찾아가 후사 결정을 종용한다. 이에 명종은 간신히 안쪽 병풍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준경은 이를 중전에게 물으라고 해석하여 중전에게 물었고, 중전은 명종이 평소 예뻐했던 하성군을 후계자로 정했다고 답해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선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선조가 명조의 총애를 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명종이 왕손들을 모아놓고 후계자를 찾기 위해 임금이 쓰는 익선관을 머리에 맞는지 써보라고 권하였는데, 어린 하성군만이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익선관을 도로 내놓았다는 일화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명조가 후계자로 생각했던 이가 선조였는지는 명조만이 알 것이다.

    ◇ 인조 – 김유, 이귀, 이괄, 최명길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은 ‘친명반청’이었다. 자신의 지지기반인 북인의 당론에 따라 형 임해군과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한 광해군은 정적들에게 쿠데타의 명분을 제공해 폐위되고 만다.

    인조반정의 중심이었던 김유, 이귀, 이괄, 최명길 등 서인 세력이 광해군의 사촌인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세운 일등 공신이었지만, 인조반정의 명분대로 친명정책을 펼친 인조는 결국 1627년 정묘호란으로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1637년에는 강화도가 점령되어 항복의식을 거행하는 등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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