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일반

효창공원에 묻힌 3 의사와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한 안중근 의사

기사입력 2014.12.08 14:29
  • 지난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로 기억되는 이 날을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로 기억하자는 움직임이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안중근 의사를 일본 정부가 '테러리스트'로 규정한 사실이 알려지자 인터넷을 중심으로 그 열기가 더욱 확산되었다. 독도, 위안부 문제 등 끊임없이 일본의 망언이 구설수에 오르는 요즈음, 삼일절을 맞아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것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

    효창공원에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의 묘'와 함께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다. 김구 선생이 그의 유해를 찾아와 묻기 위해 묘비만 세워 놓은 자리다. 안중근 의사가 최후의 유언에서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중략)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 안중근 의사. 출처: 위키피디아
    ▲ 안중근 의사. 출처: 위키피디아
    을사조약에 개탄하던 안중근 의사는 1907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한다. 의병 활동 등으로 항일투쟁을 이어가던 안의사는 1909년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고 왼손 약지를 끊어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을 써 의지를 굳게 했다.

    1909년 10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안중근 의사는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토의 얼굴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안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외에 3명의 일본인 인사를 저격하고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후 순순히 체포되었다.

    이후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이 언도되고, 3월 15일 그의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탈고한 뒤 3월 26일 교수형이 집행되어 중국 여순감옥에서 순국한다. 조국이 광복을 맞은 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발굴하지 못했다.
    - 동영상 보기: EBS 지식채널e '네번째 묘'

    최근 중국 정부는 하얼빈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개관했다. 기념관의 시계는 의거 시각인 9시 30분에 맞춰져 있고, 내부에는 안 의사의 흉상, 생애와 사상, 뤼순 감옥에서의 행적 등을 알 수 있는 사진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비록 중국이 기념관 건립을 한 것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함이란 견해가 많지만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안중근 의사의 유해도 찾아서 그의 마지막 유언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 물통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
  • 윤봉길 의사. 출처: 위키피디아
    ▲ 윤봉길 의사. 출처: 위키피디아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중국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물통 폭탄을 던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 2명을 사살하고 고위 군인 10여 명에게 큰 부상을 입혔다. 상하이 사변의 승리와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을 기념해 기념식을 열었던 이 날의 의거를 중국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이라고 했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자신을 찾아온 윤봉길 의사에게 이 날의 의거를 제안했고, 25세의 윤봉길은 흔쾌히 승낙했다고 한다. 의거 후 일본군에 체포된 윤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오사카 위수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2명의 일본군이 쏜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중국 상해에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으나 점차 발길이 끊기고 있다. 윤의사의 의거에 폭탄을 제조하고 제공한 이들이 중국인이었기에 중국인들에게도 윤의사의 의거는 의미가 깊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너무 먼 거리여서, 중국인들은 돈을 내야해서 참관이 줄고 있다고 한다. 한국정부와 국민의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 도쿄 한복판서 日王에 수류탄 던진 이봉창 의사
  • 이봉창 의사. 출처: 위키피디아
    ▲ 이봉창 의사. 출처: 위키피디아
    이봉창 의사는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에게 던진 수류탄이 제 때 터지지 않아 실패한 의거로 끝났기 때문이다. 일본 강점 시절 일본인에 비해 항상 차별과 수모를 겪던 이봉창 의사는 1931년부터 항일 운동에 나섰고, 김구 선생을 만나 일왕 폭살(爆殺) 계획을 추진했다. 마침내 1932년 1월 일본 도쿄 경시청 정문 앞에서 사병관식을 끝내고 지나가는 히로히토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지만 불발되고 말았다.

    체포된 이봉창 의사는 그 해 10월 사형선고를 받고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비록 의거는 실패했으나 이 사건 이후 한인애국단에는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고, 그 중 한명이 윤봉길 의사였다. 항일 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이었다.

    ◆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백정기 의사

    백정기 의사도 의거를 이루지 못한 독립운동가다.1931년 9월 한국·중국·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배일운동을 이어갔다. 1933년 일본주중대사인 아리요시가 상해 훙커우에 있는 일본요정에서 친일중국정객과 군인 100여 명을 초대해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아나키스트 이강훈,원심창과 함께 습격하려다가 밀고로 체포되고 만다. 광복 후에 살아서 돌아온 이강훈, 원심창과는 달리 백정기 의사는 옥사하였다.

    광복을 맞이한 후 1946년 6월 15일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제외한 삼의사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효창공원에 김구 선생과 함께 묻혀 있다. 목숨을 버려가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들의 의거를 성공과 실패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그들 모두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는 노력과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일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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